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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순천 낙안읍성

by 성 환 2022. 10. 9.

 

 


오전에 조계산 산행을 마치고 선암사에서 낙안읍성으로 이동한다.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은 상사호 옆을 지나고 또 오공재를 넘는 조정래길을 이용한다.

오공재(오공치)는 낙안면과 승주읍을 넘나드는 고개이름이다.

오공재 정상에는 낙안읍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하여 찾았다.

(2022. 10. 5  수요일  오후)

 

 

↑오공치(蜈蚣峙) 정상을 넘자 낙안면 방향에 조성된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는  맨앞 전망대와 쉼터 공간 그리고 우측 뒤에 주차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장은 10여대를 주차할 수 있다.

 

 

 

 

↑전망대에 올라 낙안읍성을 아무리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다.

 

 

↑오공치 전망대는 낙안읍성과 연계하여 관광명소로 거듭나기위해  2017년에 조성된 곳이다.

순천시는 낙안읍성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2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오공치전망대를 조성했다고 한다.

벌써 5년이 지난 지금 숲이 우거져 전망대 앞을 가린채 사계청소도 하지 않아 본래의 기능을 잃고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 5년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은 이처럼 상송저수지를 비롯하여 낙안읍성 일대가 훤히 내다 보였다.

 


 낙 안 읍 성 ( 樂 安 邑 城 )


 

■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는 구별된다.

■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서산해미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읍성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읍성으로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의 입지조건과 가장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읍성 관광코스는 몇개의코스가 있으나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안내도를 보면 동문 밖 첫번째 초가집이 관광안내소이니 그곳에서 안내도를 받아 들고 다니며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관광하면 된다.

나는 동문에서 성벽위로 올라 남문 방향으로 돌며 서문에서 내려와 민가 쪽의 체험장을 돌아보고 관아쪽의 동헌 등을 둘러보고 나왔다.

 

 

↑동문(낙풍루樂豐樓)

 

 

낙안읍성(樂安邑城)

낙안읍성은 1397년(태조 6) 낙안출신 절제사 김빈길이 토성을 처음 쌓았으며

1424년(세종 6)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현재의 규모로 크고 넓게 쌓았다.

정유재란으로 파괴되고 폐허가 된 읍성을 1628년(인조 6)에 낙안군수로 있던 임경업 장군이 복구하였다.

1938년 6. 14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고

2011년 3. 11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에 등재되었다.

 

 

 

↑남문을 향해 가며 모퉁이 근처 치성(雉城)에서 바라본 동문과 성벽 모습이다.

바라보이는 산은 금전산이다.

 

금전산(金錢山 668m)

금전산은 낙안읍성의 진산이다.

보이는 것처럼  산 서쪽부분의 석산 경관이 아름답다.

그곳에는 원효대, 의상대, 형제바위, 개바위 등 기암들이 도열하듯 낙안의 고유 경관을 이루고 있어 전라남도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된 산이다.

 

 

 

성안에는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90여 가구의 민가가 있다.

보통 1가구당 2~3채의 초가집과 좁은 마당 그리고 텃밭이 있다.

내 어린시절 살았던 시골집을 보는 듯하다.

 

 

↑연지(蓮池)

 

 

낙안읍성은 북쪽으로는 금전산(668m), 동쪽으로는 오봉산(598m), 남쪽으로는 제석산(563m), 서쪽으로는 백이산( 583m)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읍성 주변은 분지형의 드넓은 평야지대가 발달하여 있으며, 남쪽 가까이에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처럼 들판 한가운데에 쌓은 평지성으로서  전체적인 형태는 남벽의 길이가 북벽에 비해 긴 사다리꼴의 평면형태를 이룬다.

성내의 도로는 동,서,남 3개의 성문을 잇는 T자형의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남문(쌍청루雙淸樓)

 

 

 

남문을 지나 저 멀리 오르막길

안내도에는 「빈길등」이라고 씌여있다.

그 뜻을 아는 바 없으나 전망 좋은곳에 이름지어 놓은 것으로 보아 토성을 처음 쌓았던 김빈길 장군의 빈길과 오르막길의 합성어가 아닐까 하고 추정해 본다.

 

 

 

↑성밖의 민가

 

 

↑초가집 사이의 텃밭

 

 

↑빈길등 오르막길에서 내려다 본 낙안읍성의 민가 모습이다.

관아는 왼쪽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바로앞 나무가지 사이로 하얗게 보이는 것은 드라마 촬영중인 천막이다.

올라 오면서 그쪽 방향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싶었는데 촬영지역 이동구간을 통제하는 사람이 있어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구름 그림자에 가려 검게 보이는 산이 오봉산(598m)이다.

 

 

 

↑서문방향

 

 

↑서문(낙추문樂秋門)


 

 

↑연자방아 조형물

 

↑유서체험장

 

↑전통혼례체험장

 

↑왼쪽에서는 드라마촬영이 진행중이고 우측 담너머에는 많은 엑스트라들이 대기중이다.

내년 4월 방영 예정인 MBC드라마 「조선변호사」라고 한다.

 


 

↑樂民樓(낙민루)

6,25때 소실된 것을 1984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층은 동헌의 출입문이고 2층엔 마루중앙에 낙민고(樂民鼓)를 설치하였다.

 

 

↑낙민루 뒤로 동헌 입구

 

 

↑使無堂(사무당) : 東軒(동헌)을 말한다.

 

東軒(동헌)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지방행정과 송사(訟事)를 처리하던 곳이다.

지금의 동헌 건물은 1990년 모두 복원된 것이다.

 

 

↑동헌에서 내아로 통하는 측문

동헌 우측에 있다.

 

 

↑內衙(내아)

내동헌이라고도하며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 즉 군수의 관사를 말한다.

이 건물 또한 1990년 복원한 것이다.

 

 

↑내아 정문

 

 

↑낙안객사(樂安客舍)

이곳은 왕명을 받고 오는 사신들이나 읍성을 찾은 관리 또는 외빈들이 돌아갈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1450년(세종32년)에 군수 이인(李茵)이 건립했고 그후 두차례 중수하였다.

객사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 있다

 

↑樂安之館(낙안지관)

낙안객사를 말한다.

동쪽 방은 문관이 서쪽방은 무관이 숙소로 사용되었고 중앙 마루에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신곳으로 수령이 왕을 상징하는 전패에 절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林慶業將軍碑閣(임경업장군비각)

인조4년(1626년)에 낙안군수로 부임해 와서 인조6년(1628년) 3월 한양으로 옮겨갈 때까지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낙안읍성을 복구하는 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큰 공을 세운 군수 임경업을 기리기 위해 임경업이 군수직을 마치고 낙안읍성을 떠나던 해에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웠고  비각은 영조24년(1748년)에 세웠다.

 

↑비각 안에 세워진 비를 들여다 보니  郡守林公慶業善政碑(군수 임공 경업 선정비)라고 세겨져 있다.

 

 

낙안읍성 관람을 마친다.

 

 

↑동문 밖  3. 1 독립운동 기념탑


▼ 고창읍성과 해미읍성으로 가보기

 

 

고창읍성(高敞邑城)

이틀전 낙안읍성에 갔었다. 낙안읍성,서산해미읍성, 고창읍성을 대한민국 3대 읍성이라 한다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창읍성을 찾았고. 머지않아 해미읍성을 가 보려고 한다. ■ 탐방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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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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