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6 (목)
새해 첫 산행지를 추월산으로 정하고 담양호관광단지를 네비에 찍어 출발한다.
동네를 벗어나기 전 손녀랑 함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차를 돌려 손녀를 태우러 간다.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어 단양온달관광지가 떠오른다.
그래 !
단양으로 가는거야~
온달산성
드라마오픈세트장 옆으로 온달산성 등로가 있다.
거리는 1km 정도로 왕복 50분 소요된다고 씌여있다.
보통 사람 기준이니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겠지?
↑단양의 온달과 평강공주의 케릭터가 있어 손녀랑 한컷
온달(溫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온달설화로 잘 알려져 있다.
설화 속 인물이지만 역사적 실존 인물임에 틀림없다.
온달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설화에 의존하고 있고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장소 마저도 해석이 분분하며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온달의 이야기도 설화적이라고 한다.
↑등로 우측으로 드라마세트장이 있다.
산성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세트장에도 가 봐야지...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산성이 보인다.
↑이곳을 포함하여 그림에 보이는 남한강 주변은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속한다.
남한강은 왼쪽(서쪽)으로 흐른다.
남한강은 태백의 금대봉 자락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골지천을 따라 정선의 조양강으로 흘러들고 지장천을 더하여 동강을 이루어 백운산(883.5m)을 빙돌아 감입곡류를 이루며 흘러 영월에서 단종의 유배지 청룡포를 감싸고 천천히 흘러드는 서강과 만나 남한강이 된다.
그 남한강은 단양으로 들어와 우측에 보이는 영춘면앞을 지나 영춘교와 이 앞을 휘돌아 서쪽 충주호로 흘러간다.
온달산성(溫達山城)이 축성된 이곳은 454.5m의 성산(城山)이다.
성안의 높은 봉우리에 우리가 밟고 있는 납작한 돌들이 성벽을 축조한 석재들과 같은 것들이다.
↑남문과 남벽 보수(복원)공사 중으로 우회 하란다.
성안에 정자도 있다.
↑반대편으로 건너와 봤다.
성안의 가장 높은 곳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동문이 보인다.
↑산성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미세먼지인지 뭔지 연무가 뿌옇게 끼어서 지형을 특정하긴 어렵지만 그림 중앙의 봉우리 좌측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영춘면 남천리 일원이며 우측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구인사로 들어가는 곳으로 짐작된다.
저 높은 산군은 소백산이다.
↑북벽과 동문
↑성 북벽위 끝에 올라가서 성안을 본다.
어디엔가 건물터와 우물터가 있었다는데...
↑북문
↑북문 밖에서
↑우측 북문과 치성(雉城)
치성(雉城)이란 성곽 일부를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든 지형지물을 말한다.
산성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잃고 허물어지거나 유실된 성터로 남아 조선전기에는 성산성(城山城)이란 이름으로 기록이 있었다고 하며 온달산성(溫達山城)이란 이름은 그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산성 모습은 발굴조사와 함께 대부분 복원된 것이며 복원 수리중에 있다.
온달산성(溫達山城) : 사적 제 264호
산 정상부에 반월형(半月形)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산성의 위치와 형식으로 보아 고구려의 산성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온달 장군의 무용담이 이 지방에 전해오는 설화로 인해 붙여진 산성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쪽의 고구려가 남쪽의 신라군을 막기 위해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소백산 산지를 향해 산성을 축조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성 북쪽의 치성(雉城)이 말해주듯 북쪽의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신라에 의해 축조된 산성으로 보는 게 옳다.
성곽의 길이는 약 683m의 작은 산성으로 남한강 유역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이 심했던 6세기 중엽의 신라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6세기 중엽에 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온달이 590년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고 하는 아단성(阿旦城)은 단양 영춘(永春)의 옛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인 점으로 보아 아단성(阿旦城)은 서울의 아차산성(阿且山城)이 아니라 이곳 산성의 이름이 온달산성으로 이름 붙여지기 전의 산성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온달(溫達 ? ~590) 이야기
어린시절 가난했고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옷차림이 남루하고 용모가 우스꽝스러워 바보온달이라 불렀다.
평강공주가 어릴 때 울기를 잘해 평원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낼 거라며 놀려 평강공주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혼기가 차서 귀족인 상부고씨와의 혼인을 거절하고 온달과의 혼인을 고집한다.
평강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 온달을 찾아가고 평강은 준비해간 보배를 팔아 노비와 말 등을 사들여 살림을 꾸리고 온달에게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가르쳐 훌륭한 장수로 만든다.
매년 3월3일 실시하는 사냥대회에서 귀족 출신 등의 무사들을 제치고 우승하여 왕으로부터 대형(大兄)이라는 벼슬을 받게 되며 부마(駙馬)로써 인정받는다.
590년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 즉위 원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탈환하고자 출전하여 아단성(阿旦城)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삼국사기)
(참고로 2021.2.15.~4.20 방영된 KBS2TV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는 온달은 순노부 족장 온협 장군의 아들이며 타고난 무예실력과 순발력을 겸비한 인물로 일찌기 부모를 잃고 실명(失明)한 유모를 봉양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오픈세트장
이곳 드라마세트장은 수나라, 당나라 시대의 황궁과 저택, 처소, 낙양성문, 저잣거리 등을 재현해 놓은 세트장으로 "연개소문"을 비롯하여 "천추태후"와 "태왕사신기" 등 많은 사극 드라마를 촬영했던 곳이며 특히 온달과 평강공주의 순애보를 그린 "달이 뜨는 강"이 촬영된 곳이다.
↑낙양성문
들어가 보자.
이런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손녀가 좋아해서 앞으로 손녀 덕분에 가야할 곳이 많을 것 같다.
↑산 위에 산성의 북벽이 보인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수양제가 쾌락에 빠진 모습을 담은 양자강 하류의 강도의 이궁 연회장 촬영 장소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수문제 후궁 진부인의 처소
진부인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한 진나라의 공주였다.
↑진부인 처소의 약재원
↑천추태후 촬영장소
↑수 · 당 황궁
↑저잣거리
온달동굴
온달동굴(溫達洞窟) : 천연기념물 제 261호
↑박쥐
온달관
온달관은 고구려의 영웅 온달의 정신과 혼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전시관이다.
전시관 내에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있고 평강공주의 내조로 고구려 장수가 된 온달의 무용담과 전승지에 얽힌 설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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