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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고창읍성(高敞邑城)

by 성 환 2022. 10. 17.

 

이틀전 낙안읍성에 갔었다.

낙안읍성,서산해미읍성, 고창읍성을 대한민국 3대 읍성이라 한다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창읍성을 찾았고.

머지않아 해미읍성을 가 보려고 한다.


■ 탐방일자 : 2022. 10. 6 (목)

 

■ 탐방경로 : 북문에서 성벽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동헌, 객사, 풍화루 등 성내 관아건물들을 찾아본다.

 

 

↑입구 전경

 

고창읍성(高敞邑城) 

고창읍의 남산이라고 하는 장대봉(將臺峰)의 등성이를 에워싸서 쌓은 성이다.

고창읍성을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그 근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양부리(毛良夫里)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한자 뜻이 전혀 달라 설명이 부족하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원년(1453년)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성한 성곽으로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던 것을 원형에 가깝도록 보수공사를 하여 복원한 것이다.

성곽의 둘레는 1,684m, 성벽의 높이는 4~6m, 성문은 북문, 동문, 서문과 성문 앞에 옹성(甕城)을 쌓았고 성곽 둘레 돌출 부분에 6개소의 치성(雉城)을 갖추고 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개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북문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일부 건물만 복원된 상태이다.

고창읍성은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북문 입구(정문)

 

 

↑拱北樓(공북루) : 북문

 

 

 

↑옹성 위의 모습

 

 

 

 

↑북문과 옹성(甕城)

 

 

↑북문과 동북치 중간 성벽위에서 바라본 고창읍

바로 앞 넓은 광장을 북치광장이라 한다.

 

 

↑읍성 동북방향의 방장산

 

 

↑동북치(東北雉)

※ 치성(雉城)이란 성곽 일부를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든 지형지물을 말한다.

 

 

 

↑동북치를 지나며 성안에 내려다 보이는 관아건물이 있어 찾아가 본다.

 

 

↑官廳(관청)

지방관아의 주방(廚房)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수령(守令)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 빈객(賓客)들의 접대 등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사무를 관장했던 곳이다.

1992년 복원되었다.

 

 

↑동문 : 등양루

 

 

登陽樓(등양루) : 동문

 

 

↑동치

동문에서 동치 방향은 오르막이다.

 

 

↑동치에서 내려다 본 동문

 

 

↑답성 행렬(고창군 자료 참고)

 

답성(踏城)놀이

 

답성놀이가 행해지는 대표적인 곳이 이곳 고창읍성(모양성)이다.

답성놀이와는 또다른 모양성제(牟陽城祭)가 매년 음력 9월9일에 열리는데 이 축제도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답성놀이가 추축이 되고 있다.

고창 모양성의 답성놀이 풍속은 1678년(숙종4년)에 고창현감 이항(李恒)이 폐성된 모양성(牟陽城)을 대대적으로 개축할 때 윤3월을 택하면서부터 시작된 세시풍속이 되었다.

윤달의 답성(踏城)놀이는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샛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고창 모양성 답성놀이는 윤달에 북망산천의 저승문이 열린다는 속설로 전국 각지에서 소복단장을 한 부녀자들이 성밟기를 하려고 찾아든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소복단장은 생전에 극락왕생을 체험하는 의미가 강하다.

답성의 순서는 북문으로 들어선 후 손바닥 크기의 성돌을 머리에 이고 동쪽 성곽 위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 있는 듯하다. 또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성 개축 당시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石戰)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叡智)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정신을  빛내 주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동치에서 동남치로 가는 방향

 

 

↑동남치 쪽에서 뒤돌아 본 성벽 모습

 

 

↑동남치

 

 

↑성안 모습

 

 

↑뒤돌아 본 동남치와 성벽

 

 

↑동남치에서 남치 방향

 

 

↑남치에서 바라 본 성밖 모습

 

 

 

↑남치에서 성안 모습

건물이 있어 찾아가 본다.

 

 

↑城隍祠(성황사)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성황신(城隍神)을 모시던 사당이다.

서낭당 또는 성황당(城隍堂)이라 하는 곳이다.

조선시시대의 성황사가 있었던 이곳 터에 1991년 발굴조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복원한 것이다

 

 

↑남치에서 서남치로 이동

 

 

↑뒤돌아보면 성안의 송림과 우측 성밖

 

 

↑서남치

 

 

↑서문

 

 

 

↑鎭西樓(진서루) : 서문

 

 

 

↑서문에서 바라본 고창읍

 

 

 

↑서북치

 

 

 

 

↑↓鄕廳(향청)

 

 

↑鄕廳(향청)

지방의 향리(鄕吏)를 규찰(糾察)하는 등 향촌교화(鄕村敎化)를 담당하던 곳

 

 

↑書廳(서청)

 

 

 

↑ 內衙(내아)

수령이 기거하는 살림집

 

 

↑東軒 (동헌)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 : 지방행정과 송사(訟事)를 처리하던 곳이다.

건물 정면에 平近堂(평근당)이라 걸린 현판은 고을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牟陽之館(모양지관)

건물 중앙에 牟陽之館이란 현판을 걸었다. 모양성 객사를 뜻한다.

좌우측의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중앙 마루에는 전패(殿牌)를 모신곳으로 수령이 왕을 상징하는 전패에 절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作廳(작청)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

 

 

 

 

↑豊和樓(풍화루)

고을의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의 누각

 

 

↑풍화루를 지나며 바라본 동북치 아래 관청

 

 

↑將廳(장청)

현감(縣監), 병방(兵房), 군교(軍校)들이 군무(軍務)를 보살피던 청사

 

 

↑大院君斥和碑(대원군척화비)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다.

1866년(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1871년(신미년)에 비문을 세웠다.

※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한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척화비 뒷 모습

 

↑獄(옥)

 

↑탐방을 마치고 나가며 성밖 왼쪽을 바라본다,

멀리 비석들(碑石群비석군)이 보인다.

옛날부터 고창과 인연을 맺었던 역대 관찰사(觀察使), 현감(縣監), 군수(郡守) 등의 선정비(善政碑)를 모아 놓은 곳이다.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낙안읍성과 고창읍성은 많이 다르다.

낙안읍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 쌓은 성인데 고창읍성은 나지막한 야산의 산등성이를 둘러 축성한 성이다.  그러한 지형적인 연유때문이겠지만 낙안읍성은 성안에 관아와 많은 주민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민가가 있는가 하면 고창읍성은 성안에 관아만 있고 민가는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성의 면적은  낙안읍성이 고창읍성보다 더 넓다.

 

■ 고창읍성 위치도

 

 

▼ 낙안읍성과 해미읍성으로 가보기

 

 

 

순천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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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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