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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완도] 보길도 윤선도원림/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by 성 환 2021. 10. 3.

 

 

섬내에 명당자리가 11곳이 있는데 10곳은 이미 쓰고 남은 1곳 마저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뜻(十用十一口)을 지닌 섬, 보길도(甫吉島) 여행을 떠난다.

8시 여객선을 타기위해 천안에서 새벽 일찍 출발 했지만 어두움과 새벽 안개가 지나칠 만큼 짙게 깔린 구간이 몇군데 있어 무려 4시간 50분 가량을 쓰고 땅끝선착장에 도착하여 한시간 지체된 9시에 출발하는 해광운수 드림장보고호에 승선 할 수 있었다.

 

 


●  일 자 : 2021. 9. 30 

●  탐방코스 

(땅끝선착장--노화도산양항) -- 세연정 - 동천석실 - 낙서재 - 곡수당 - 망끝전망대 - 우암송시열글씐바위 - 예송리해변 ---(노하도동천항--화흥포항)

 

 

 

↑몇달전 다녀간 땅끝전망대도 반갑게 보인다.

 

 

↑여객선은 선착장을 빠져 나간다.

 

 

↑평일 오전이기 때문인지 객실은 이처럼 텅 비어 있다.

승선한 차량도 겨우 10여대 정도

 

 

 

 

 

땅끝전망대가 멀어지고 노화도가 가까워지고 있다.

 

 

↑노화도가 가까워 지면서 섬 해안에 전복양식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객선이 선착장에 접안하자마자 지체없이 차들이 빠져나가니 머뭇거릴 여유도 없이 따라나간다.

 

 

↑노랗게 물들어 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노화도를 관통하고 있다.

 

 

↑노화전통시장앞에서 바라본 보길대교이다.

저 다리를 건너 작은 섬 장사도를 지나 보길도로 연결된다. 

 

노화도(蘆花島)

완도의 부속섬으로 보길도와 보길대교로 연결되어 있고 소안도와 횡간도 등 주변에 크고 작은 50여개의 섬들로 소안군도를 이루고 있다.

노화도는 등산리에 있는 148m의 고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대가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고 해안의 드나듦이 심하여 만입부의 넓은 간석지가 염전과 농경지로 이용되며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여 생활한다.

1980년에 노화읍으로 승격되어 (완도군청 확인) 현재 인구는 5,710명이며 완도에서 생산되는 전복의 80%는 이곳 노화도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  보  길  도

 

윤선도문학관앞에 잠시 멈추고 바라보니 너무 조용하다.

문은 모두 닫혀있고 인적도 없다. 

세연정을 찾아 보자...

 

 

 

문이 닫혀있고 조용한 이유가 평일인데다 모두 코로나19 확산 때문이란 걸 알았다.


▼ 세연정(洗然亭)

보길도 윤선도원림(甫吉島尹善道園林)은 

맨처음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이라 했는데  보길도윤선도유적(사적 제368호)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보길도윤선도원림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명승 제34호로 재지정되었다

사적 해제와 명승 지정 사유는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준에 따른 것으로 보길도 천혜의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정원 조성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원림(園林)이란 뜻도 순수 자연을 그대로 두고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정원(庭園, garden)과 다르다고 한다.   

 

 

세연정을 관람하려면 이곳에서 매표를 해야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휴관중이어서 관람할 수 없다.

열린 문으로 들여다 보니 화장실만 이용가능하고 출입금지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먼데서 찾아왔는데 이대로 돌아간다면 세연정은 영영 보지 못한단 말인가..?

 

 

 

 

 

왼쪽 기와집이 매표소이고 가운데 보길초등학교 그 우측으로 우거진 숲속에 세연정이 있다.

 

 

이런 길이 있다는 건 외지에서 온 관람객은 모를 수 밖에 없다.

주민이 알려주어 왔지만 출입금지 표지판을 보고 들어갈 수도 없지 않은가...

돌아섰다가

또다시 동네 어른의 조언을 듣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진만 찍고 나왔다.

 

 

 

 

 

세연정(洗然亭)

세연지와 뒤쪽 회수담 사이에 지어진 정자이다.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세연정에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세연정은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건축된 것인데 그 후 소실되었다가 1994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연정 사방에 편액을 달았는데 동쪽에 呼光樓(호광루), 서쪽에 仝何閣(동하각), 七岩軒(칠암헌), 남쪽에 樂飢欄(낙기란)을 달았다고 한다.

세연정까지 접근하여 자세히 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 동천석실

 

 

↑왼쪽 위의 바위와 소나무에 가려진 동천석실과 우측 아래 침실이 있다.

 

 

석담(石潭)

암석을 파서 인공으로 만든 연지(蓮池)이다.

 

 

↑희황교(羲皇橋)

동천석실로 가는 석교(石橋)로 희황교라 이름 붙였다.

희황은 중국 황제를 말하는데 동천석실을 천자(天子)가 사는 곳으로 비유하여 이름한 것이다.

 

 

↑寢室(침실)

동천석실(洞天石室) 20m 아래 동천석실과 비슷한 크기의 건물이다.

고산이 추운날에는 이곳에서 불을 때고 쉬었던 곳으로 추정 한단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모습 

건너편 격자봉 아래 그림의 중앙에 낙서재가 보인다.

 

 

 

 

 

↑洞天石室(동천석실)

동천석실은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선계세상이며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동천석실 주변 천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칸 짜리 목조건물인 침실 등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을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龍頭岩(용두암)

동천석실 앞에 두개의 이 바위를 말한다.

용두란 도르레의 방언이라고 한다.  두 바위사이의 홈에 도르레 같은 시설을 설치하여 통속에 넣은 음식을 줄에 매달아 건너편 저 멀리 보이는 낙서재 지역으로 부터 날라다 먹었다고 하니 참으로 전설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산이 동천석실에서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다 추우면 불을 피우고 쉬었다는 침실 아래에 있는 아궁이 모습이다.

 

 

 


▼낙서재와 곡수당으로

↑낙서재로 가는 옛길

 

 

 

 

 

↑왼쪽은 곡수당, 오른쪽은 낙서재

 

 

↑낙서재로 가며 왼쪽에 보이는 곡수당 모습

 

 

 

↑뒤돌아 보니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 있는 곳이 보인다.

 

 

 

樂書齋(낙서재)

격자봉(格紫峰) 아래 혈맥이 세차례 꺽여 내려와 소은병(小隱甁)이라는 병풍바위 아래 명당자리에 집을 짓고 고산이 거주했던 곳이다.  당시엔 초가였지만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낙서재는 고산이 많은 책을 쌓아두고 독서를 즐겼던 곳이고 낙서재 앞에 침소였던 무민당(無悶堂)이 있었는데 농토로 개간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단다.

 

 

龜岩(귀암)

낙서재 마당 바로 앞(북쪽)에 있고 고산이 달맞이 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격자봉에서 낙서재 뒤에 있는 병풍바위와 낙서재 그리고 이 귀암이 축선을 이루며 혈맥과 관련된 낙서재가 풍수지리상의 명당자리라는 것이다.  

 

 

↑小隱屛(소은병) : 병풍바위

 

 

 

↑祠堂(사당)

고산이 낙서재에서 돌아가신 뒤 얼마간 초장을 지낸 곳이다.

 

 

↑典祀廳(전사청)

제사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에 필요한 도구들을 보관 하던 곳

 

 


 

▼ 곡수당(曲水堂)

 

↑왼쪽 건물이 곡수당이고 우측의 건물이 서재이다.

 

 

 

 

 

↑書齋(서재)와 일삼교

서재는 고산의 아들과 제자들이 고산선생에게 배우던 곳이다.

 

 

 

↑曲水堂(곡수당)

곡수당은 고산의 아들 학관의 처소이다.

수리봉 계곡물이 흘러들어 이곳에서 곡류를 이룬다하여 곡수당이라 했단다.

고산의 5남이던 학관이 이곳에 머물며 경학에 힘쓰던 곳이다.

 

 

 

 

↑곡수당을 떠나며 뒤돌아 본다.

 

 

보길도(甫吉島)

해남 땅끝마을 남쪽에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완도의 부속섬으로 육지에서 들어갈 때는 노화도 여객터미널을 거쳐 연도교(보길대교)를 건너 들어온다.

보길도(33㎢)는 노화도(25㎢)보다 넓은 섬이지만 산지가 많아 거주하는 주민의 수는 노화읍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현재 보길면 : 2,700여명, 노화읍 : 5,700여명)

보길출장소로 노화읍에 통합되어 있다가 1982년에 보길면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소안군도 중에서도 보길도를 많이 찾는 이유는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학자인 고산 윤선도가 만년에 은둔생활을 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고산이 절경에 매료될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636년(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자 윤선도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 이듬해 1월 수 백명의 가복(家僕)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도중에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해 가던 중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굴욕감에 평생 은거를 결심하고 뱃길을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제주도를 향해 가던 중 소안군도 앞을 지날 때 이곳 보길도의 경치에 매료되었든 태풍을 피하기 위해 보길도에 들렀든 수려한 산수는 윤선도를 붙잡게 되었고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여 은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보길도는 섬의 가장 높은 격자봉을 중심으로 동북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溪流)가 흐르고 산세가 마치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당쟁으로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을 멀리하고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이곳에 낙서재, 세연정, 곡수당, 동천석실 등 낙원을 건설하여 문인들과 시문을 즐기고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

고산 윤선도는 1637년(51세)에 처음 들어와 ~1671년(85세) 낙서재에서 삶을 마칠 때까지 13년 동안 살면서 두차례의 귀양과 한양으로 올라 벼슬도 하고 해남 금쇄동에서의 생활 등 7차례나 드나들었다.

 

 


 

▼ 망끝전망대 

 

윤선도원림을 빠져나와 이곳까지 10여km를 왔다.

뒷산 망월봉의 끝자락에 있어 망끝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 망끝이라고 한다.

 

 

 

↑저곳이 보죽산이고 산 너머가 공룡알해변이다.

그곳까지는 가봐야지...

 

 

 

 

 

보족산 아래까지 왔으나 마을사이로 좁은 길을 잘못 든데다 우암송시열글씐바위까지 갔다가 완도로 가야할 시간을 고려하여 공룡알해변은 취소하고 되돌아 간다.

 

 

↑돌아오는 길에 보길면 정자리에서 바라본 넙도 방향의 전복 양식장 

 

 

 


 

▼우암송시열 글씐바위 

 

↑가는길에 통리해변

 

↑중리해변

 

 

 

 

 

 

 

 

 

 

 

1688년(숙종14) 10월 중전 인현왕후에게 자식이 없던 차에 왕이 총애하던 장옥정(희빈 장씨)이 왕자 균(후일 경종)을 낳자 숙종은 원자로 정하려 한다.  서인들은 인현왕후가 아직 나이가 어리기에 좀 더 기다려야 한다며 극렬히 반대한다.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이듬해인 1689년 정월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키고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하며 서인들을 대거 유배시킨다. 이 때 우암 송시열도 반대 상소를 올린 죄로 제주도로 유배길에 오른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이라 하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는 중전이 되며 원자는 세자로 되고 남인들이 득세하게 된다.

우암 송시열은 유배길에 이곳 백도리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며칠간 머물며 자신의 심경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83세 고령에 제주도로 귀양가는 비참한 심경을 토로하면서 그래도 그 옛날 털옷을 내리며 함께 북벌을 논했던 임금께 고마워하는 내용이다 . 그에게 털옷을 내리고 북벌을 논한 임금은 숙종이 아닌 선대 효종이었다 .

송시열은 이곳에 며칠 머문 후 제주도로 귀양가지만 다시 불러 심문해야 한다는 남인들의 집요한 상소로 제주도에서 다시 상경하게 된다 . 결국 그는 다시 육지로 나와 국문을 받기위해 도보로 상경하던 중 1689년(숙종15) 6월 3일 정읍에서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을 받고 죽는다 .

 

 

 

 

 

 

▼ 암각시문(岩刻詩文)

 

八十三世翁 蒼波萬里中 (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一言胡大罪 三黜赤云窮 (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세번이나 쫒겨나니 역시 궁하다.

北極空膽日 南溟但信風 (북극공첨일 남명단신풍)

북녘의 상감님을 우러르며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貂裘舊恩在 感激泣孤哀 (초구구은재 감격읍고충)

이 담비 털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우네.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 글씨가 작고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자세히 보면 세겨진 모습은 볼 수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간 탓으로 바위의 그 부분이 검은 색으로 변해 버린 것 같다. 

 

八十三世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赤云窮

北極空膽日 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 感激泣孤哀

 

위 글씨 외에도 좌측에 작은 글씨들이 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78 년 후 1767년 7월 제주도 임관주(任觀周)라는 선비가  우암송시열 글씐바위에 오언시를 덧붙였다고 하는데 그 시(詩)로 추정해 본다.

 

東國有尤翁  題詩白島中 (동국유우옹 제시백도중)

斯文後古厄  大老遭時窮 (사문후고액 대노조시궁)

留墨春秋筆  泣貂漢海風 (유묵춘추필 읍초한해풍)

孤臣無限感  天日照丹衷 (고신무한감 천일조단충)

이 나라에 우암 선생이 계셔 백도에 시를 남겼네  

유도는 하늘의 재앙이 따르는데 선생께서 어려움을 당했구나 .

춘추필법의 옳은 글을 남겼고 큰 바닷바람에 하사받은 털옷 생각에 눈물 지음이여

외로운 신하의 느낌은 한없고 하늘의 해만이 그 붉은 마음을 비추고 있네

 

우암송시열(尤庵宋時烈1607~1689)은 고산윤선(1587-1671)20세 연하이다.

두 사람은 모두 효종과 현종의 왕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서인인 송시열과 남인인 윤선도는 당대의 쟁쟁한 주자학의 대가들이며 성리학자들인데  두 사람은 붕당정치의 우두머리격으로 그들은 서로 정적이 되어 늘 당쟁으로 두 사람 모두 유배생활을 거듭했고 윤선도가 보길도 낙서재에서 죽은지 18년이 지난 후에 어찌보면 윤선도의 보길도에 그것도 꼬리처럼 길게 뻗어나간 끄트머리에서 우연치곤 아주 묘하게도 잠깐 머물며 바위에 글귀를 남기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모습이 너무 쓸쓸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송시열의 오언절구 (五言絶句 ) 한시가 새겨진 바위는 원래 탄시암 (嘆詩)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글씐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 예송리 해변

↑예송리 앞 바다 / 보이는 섬은 예작도

예송리해안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예송리 해변의 예송마을

 

 

 

 

↑예송리해변

 

 

♣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맨 마지막에 올린다.

 


 

보길도를 뒤로 하고....

 

 

↑동천항매표소

 

 

↑동천항에서 구도(횡간리)로 연결되는 소안1교

 

 

 

 

 

 

 

완도 화흥포항으로 가면서 좌측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암봉이 있는데 횡간도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노화도는 빠져도 횡간도는 포함되어 있다.

 

↓역광 때문에 아름다운 기암괴석의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기술 부족으로...

 

 

 

 

 녹우당이 있는  고산윤선도유적지 

 


 

어부사시사는 윤선도가 신묘년(1651, 효종2) 65세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연시조로 고려때부터 전해 내려온 어부사를 이현보가 어부가’9장으로 고쳐 지었고 다시 윤선도가 후렴구만 그대로 넣어 40수로 고친 것이다.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계절마다 10수씩 총 40수로 된 연장체 시조이다.

계절마다 펼쳐지는 어촌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부생활의 흥취를 아름답게 나타낸 작품으로 윤선도의 작품가운데서도 오우가와 함께 으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

 


(봄)

앞 강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 어사와(於思臥)
강촌(江村)의 온갖 꽃들 먼빛이 더욱 좋다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 병은 실었느냐

동풍이 건들 부니 물결이 곱게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보며 서호(西湖)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아온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누나

고운 볕이 들었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물을 넣어 두랴 낚싯줄을 놓을 건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濯纓歌)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겠도다

석양이 비꼈으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언덕 버들 물가 꽃은 굽이굽이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정승을 부러워하랴 만사를 생각하랴

방초(芳草)를 밟아 보며 난초며 지초 뜯어 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에 실은 것이 무엇인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갈 적에는 안개뿐이었고 올 적에는 달이로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리련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붉은 낙화(落花) 흘러오니 무릉도원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속세의 티끌이 얼마나 가렸느냐

낚싯줄 걷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되었느냐 자규새 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남은 흥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도다

내일이 또 없으랴 봄날 밤이 곧 새리라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삽짝문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의 생애는 이러구러 지내리로다

 


(여름)

궂은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떠라 배 떠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깊은 흥을 금치 못하겠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안개 낀 강 겹겹이 높은 산은 누가 그려 내었는고

연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푸른 대삿갓은 쓰고 있노라 녹색 도롱이는 가져오느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흰 갈매기는 내가 좇는가 제가 좇는가

마름 잎에 바람 부니 봉창이 서늘쿠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 바람 일정하게 불겠느냐 가는 대로 배 맡겨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북쪽 포구 남쪽 강이 어디가 아니 좋을런가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은들 어떠하리
이어라 이어라
오강(吳江)에 가자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프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어복충혼(魚腹忠魂) 낚을세라

버들 숲 녹음(綠陰) 어린 곳에 이끼 낀 바위 낚시터도 기특하다
이어라 이어라
다리에 도착하거든 낚시꾼들 자리다툼 허물 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학발(鶴髮)의 노옹(老翁)을 만나거든 뇌택(雷澤)에서의 자리 양보 본받아 보자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쳐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돛대를 두드리고 수조가(水調歌)를 불러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애내(欸乃) 소리 가운데에 만고(萬古)의 마음을 그 누가 알까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깝구나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푸른 숲에 꾀꼬리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구나

모래 위에 그물 널고 그늘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 하랴 쉬파리에 비하면 어떠한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다만 한 근심은 상대부(桑大夫)가 들을까 하는 것이네

밤사이 풍랑을 어찌 미리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들판 나루터에 비껴 있는 배를 그 누가 일렀는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시냇가 그윽한 풀도 진실로 어여쁘다

오두막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둘러 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비껴 쥐고 돌길로 올라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옹(漁翁)이 한가하더냐 이것이 구실이라

 


(가을)

속세 밖의 좋은 일이 어부의 삶 아니더냐
배 떠라 배 떠라
어옹을 비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의 흥이 한가지이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창파에 실컷 배 띄워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흰 구름이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흐늘댄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 타고 서호(西湖) 가고 썰물 타고 동호(東湖)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마름 붉은 여뀌는 가는 곳마다 보기 좋다

기러기 떠가는 저 편으로 못 보던 산 보이네
이어라 이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취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석양이 비치니 뭇 산이 수놓은 비단이로다

반짝이는 물고기가 몇이나 걸렸는가
이어라 이어라
갈대꽃에 불 붙여 가려서 구워 놓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질흙 병을 기울여서 박구기에 부어다오

옆바람이 고이 부니 다른 돗자리에 돌아왔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어스름은 나아오대 맑은 흥취는 멀어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단풍나무 맑은 강이 싫지도 밉지도 않구나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 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봉황루(鳳凰樓) 아득하니 맑은 빛을 누구에게 줄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저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이곳이 어드메뇨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서풍(西風) 먼지 못 미치니 부채질해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들은 말이 없었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옷 위에 서리 내려도 추운 줄을 모르겠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 좁다지만 뜬구름 같은 속세에 비겨 어떠한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리하고 모레도 이리하자

소나무 사이 석실(石室)에 가서 새벽달을 보려 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빈산에 낙엽 진 길을 어찌 알아볼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구름이 쫓아오니 여라의(女蘿衣)가 무겁구나

 


(겨울)

구름 걷힌 뒤에 햇볕이 두텁다
배 떠라 배 떠라
천지가 얼어붙었으되 바다는 의구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깁 비단 편 듯하다

낚싯줄이며 낚싯대 손질하고 뱃밥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강(瀟湘江)과 동정호(洞庭湖)는 그 물이 언다 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때에 고기 잡기 이만한 데 없도다

얕은 개의 물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나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잠깐 날 좋을 제 낚시터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가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이 다르구나
이어라 이어라
앞에는 유리 같은 만경창파요 뒤에는 옥 같은 천 겹 산이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그물이며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이어라 이어라
앞 개를 건너려고 몇 번이나 헤아려 보았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공연한 된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자러 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나갔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발이 잦아드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압지(鵝鴨池)를 누가 쳐서 초목의 치욕을 씻었던고

붉게 물든 벼랑 푸른 절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작은 물고기를 낚으려나 못 낚으려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쪽배에서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채 흥에 겨워 앉았노라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궂은 구름 한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 소리를 싫어하지 마라 속세의 시끄러움 막는도다

창주오도(滄洲吾道)를 예로부터 일렀더니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七里) 여울에서 양피(羊皮) 옷은 그 어떠한 이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천 육백 날 낚시질은 손꼽을 제 어찌하던고

어와 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도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 데 흥청이며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雪月)이 서봉(西峯)을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자

 


 

오우가(五友歌) 6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떠오르니 그 모습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지만 자주 검어지고
바람 소리 맑다지만 그치는 때가 많노라
깨끗하고도 그치는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었다가 쉽게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른 듯했다가 누레지는지
아마도 변치 않을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따뜻해지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하여 눈이며 서리를 모르느냐
깊은 땅속까지 뿌리 곧게 뻗어 있음을 이로 인해 알겠노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누가 곧게 자라게 한 것이며 속은 어이하여 비었는가
저러고도 사시사철 푸르니 그것을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