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

by 성 환 2021. 9. 29.

 

↑고산 윤선도 유적지인 녹우당(綠雨堂)은 바라 보이는 산(덕음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좌우로 벼루봉과 필봉이 호위하고 있어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左靑龍右白虎 南朱雀北玄武)라고 하는 풍수지리의 전형적인 명당자리라고 하는 곳이다.

녹우당은 해남윤씨가 기반을 펴고 가풍을 이어가는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보길도를 들어가 보기 전에 이곳 유적지를 먼저 들러 보고싶어 지난 4월에  다녀 갔었으나 녹우당 내부 관람을 하지 못해 다시 찾아 볼 계획이었지만 녹우당은 끝내 다시 찾지 못한채  보길도 여행을 앞두고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 다녀간 날  :  2021. 4. 25 (일)

 

孤山 尹善道(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하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가 떠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언제인지 교과서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시조에 매우 뛰어났던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학자였다.   26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당시 정치적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난 윤선도는 고집스럽고 강직한 선비로써 집권세력인 서인에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윤선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부족함이 없이 은거생활을 하며 이때 탁월한 문학적 역량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다윤선도는 성품이 강직하여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서 자주 유배를 당했는데 오히려 그런 유배와 은거 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의 자연을 소재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음악을 즐겼던 풍류시인 윤선도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지만 윤선도가 평생 지었던 시조들은 국문학사상 최고봉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가인으로 불리고 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 (海南尹氏 綠雨堂 一圓)

사적 제 167호(1968. 12. 19)

이곳에는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녹우당과 그의 조상 어초은 윤효정의 묘와 사당, 그리고 고산사당이 있으며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등이 있다.

※  해남윤씨 녹우단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은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역사와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고산 윤선도와 공제 윤두서에 대한 삶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해남윤씨(海南尹氏) 어초은파(魚樵隱派)

어초은(魚樵隱)은 윤효정(尹孝貞)의 호이며 고산 윤선도의 고조부가 된다.

윤효정은 해남에서 해남윤씨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해남에서 가까운 강진에서 살았는데 당대 거부이던 해남정씨(海南鄭氏)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된 인물이다.

어초은공파는 소윤공파(小尹公派)의 한 종파로 윤효정을 이은 계파이다.

     * 小尹公派 : 9世 尹丹鶴(윤단학),  魚樵隱公派 : 12世 尹孝貞(윤효정)

 

 

 

 

 

 

제 1 전시실

 

제1전시실에는 녹우당에 터를 잡고 600여년 이상을 대대로 이어온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사대부가의 삶에 대하여 고문서와 서책등을 전시한 곳이다.

 

 

 

 

해남윤씨의 시조는 윤존부(尹存富)이며 12(윤효정)까지 강진에서 거주하였다.

이후 윤효정이 해남정씨 정호장의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이곳 백련동(白蓮洞)에 정착하게 되었다.

 

 

 

 

 

윤씨가의  家風은 「백성에 대한 사랑」을 모토로 하고 있다.

윤효정 : 삼개옥문(三開獄門)

            세금을 못내 옥에 갇힌 백성들을 대신해 세금을 내어주고 풀어주는 일을 세 번이나 했음

윤선도 : 근검적선(勤儉積善)

윤두서 : 애민(愛民)

 

 

 

 

윤효정은 하급 무관이었으나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해남땅의 반 이상을 소유했던 해남정씨 정호장의 사위가 될 수 있었으리라....

이때부터 해남윤씨가의 재력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노비의 규모만 해도 50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먼 후일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하기 위해 강화도로 떠나면서 가복 수백명을 배에 태우고 갔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며 역시 윤선도는 금수저였구나 하는 생각이다.

 

 

 

 

 

 

 

 

 

 

종가 음식 : 肉饅頭(육만두), 어만두(魚饅頭), 감단자(柿團子), 비자강정(榧子羌飣)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의 가문을 이어가는 종부(宗婦)의 역할도 컸으리라...

 

 

 

↓아래 규한록은 해남윤씨 종부의 삶을 이야기한 수필형식의  광주 이씨가 쓴 내방문학 작품이다. 

 

 

 


 

제 2 전시실

 

제 2전시실에는 이 집안의 대표적 인물인 고산 윤선도와 조선 후기 화단의 선구자인 공재(齋) 윤두서(尹斗緖)의 생애와 문학, 서예 등을 전시한 곳이다.

공제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이며 정약용의 외증조이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 : 국보 제 240호

공재(1668~1715)는 17세기 말 ~ 18세기 초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겸재(정선), 현재(삼사정)와 함께 조선후기 삼재화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공재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최초로 선보였고 사실주의 화풍도 개척한 화가이다.

 

 


 

 

 

↑明月亭(명월정)

전시관을 나와 녹우당으로 가는 길에 있다.

 

 

 


↓녹우당(綠雨堂)

 

 

 

녹우당은 윤선도가 살았던 집이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 이곳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지나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는 윤선도가 경기도 수원에 있을 때 효종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내려준 집으로 1668년(현종9년)에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녹우당 안채는 ㄷ자형이며 사랑채까지 ㅁ자형으로 조선시대 상류층의 전형적인 주택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입구의 은행나무는 윤효정의 아들 진사시 합격 기념으로 심은 나무로 녹우당을 상징하고 있고 뒷산에는 500년된 비자나무숲이 있어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문도 옆문도 모두 잠겨져 있다.

녹우당은 항시 개방하였으나 훼손, 도난, 분실, 고성방가 등의 피해로  언제부터 인지 한시적으로 담당자 입회하에 개방한다고 붙여 놓았다.   관람을 원하면 유물관 관리사무소에 문의 하란다...

 

 

 

 

 

 

 

 

↑고산사당(孤山祠堂)

고산 윤선도룰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사당에서 제를 모시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매년 음력 6월 11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고산사당 위에 있다.

매년 음력 11월 15일 이곳에서 기제사를 지낸다.

 

 

 

 

孤山尹善道先生 詩碑(고산윤선도선생 시비) / 어부사시사시비

 

 

 

 

↑↓忠憲閣(충헌각)

현재의 유물전시관 이전에  전시관으로 쓰던 건물이었다고 하던데...

 

 

 

 

 

 

 

아쉽게도 녹우당 내부는 관람하지 못했고 어차피 다시한번 다녀갈 마음으로 녹우당 윗쪽에 치우쳐 있는 추원당과 어초은묘, 비자나무숲은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이 발길이 마지막 발길이 되고 말았다.

 

 

● 안내지도

 

 

 

 

이제 보길도로 떠나 보자 ~ 

 

 

바로가기  보길도윤선도원림

 


 

 

☞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삶 (1587~1671)을 대강 요약해 본다.

 

윤선도는 1587년 7월 27일(음 6월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윤유심(尹唯深)과 순흥 안씨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594년(선조 27년) 8세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강원도 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입양되어  전라남도  해남군 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1603년 17세에 남원 윤씨 판서 윤돈의 딸과 결혼하고

1612년(광해군 4년) 26세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어 바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을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17년(31세)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  이후 경원과 경상남도 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를 병진소(丙辰疏)라 한다.

#(이때 윤유기도 삭탈관직되어 낙향한다.)

경원과 기장 유배살이 중 그는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619년 5월 (33세) 양아버지 윤유기(尹惟幾)의 상을 당하여 특별히 풀려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유배지로 되돌아갔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윤선도는 8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서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천거된 벼슬을 사양하고 해남으로 내려간다.

 

1628년(인조 6년) 42세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 급제하였다.

왕자사부(王子師父)의 한 사람이 되어 봉림(鳳林)대군과 인평(麟坪)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 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했다.

이때 세자시강원에서 정적(政敵) 송시열을 만난다.

(우암 (尤庵 )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고산 윤선도보다 20 세 연하이다.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송시열과 윤선도는 이 후 끊임 없이 논쟁을 하며  붕당정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1632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과 겸임하던 왕자사부직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간다.

 

1633(인조 11) 행세자시강원문학(行世子侍講院文學)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1634(48)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나갔다가 경상도 관찰사 유백증(兪伯曾)의 탄핵으로 성산 현감에서 파직당하였다.

 

1636(인조 14) 12(50) 병자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자,  16371월 그는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 뱃길을 돌려서 제주도로 향한다.

그는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보길도(甫吉島)에 들렀다가 그곳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윤선도는 보길도의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여기에서 시문과 술, 문객과 문인들,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석실(石室) 등을 지었다.

 


병자호란이 쓸고 간 분위기 좀 살펴보자..

1637년 정월 인조는 꽁꽁 언 땅을 밟으며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삼전도(三田渡 송파 삼전나루)에 이르러 청태종이 앉아 있는 단을 올려다 보며 무릎꿇고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한다. 이것을 삼전도의 치욕이라 한다.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소현세자(26)와 봉림대군(19) 그리고 척화론자(斥和論者)인 오달재(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 대신들과 그밖의 신하들을 합쳐 197명이 인질로 잡혀간다.

 

8년후 1645년 소현세자(34)와 봉림대군(27)이 돌아온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에 있는 동안 지나친 재량권 행사로 심기가 불편해 있었고 세자의 행동거지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인조의 냉대 속에 소현세자(1612~1645)는 귀국 한지 석달 만에 병석에 눕고 사흘 만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인조는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세손을 후사로 삼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1642년 인조 20년 (고산 56세) 금쇄동에 머물면서 산중신곡을 펴냈다.  그 중에 오우가 6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1649년(인조 25) 5월 8일 인조가 병으로 사망하고  5월 15일 효종(봉림대군) 즉위

 

1651년 효종2년 (고산 65세) 보길도에 은거하며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고산유고 (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

 

165210월 예조 참의가 되어 '시무팔조 (時務八條)'를 지어 올렸고  원두표의 권력이 강한 것을 비판한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렸다.

시무팔조와 논원두표소를 올리면서 그는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공격을 받자 스스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군 고산(孤山)의 별장에 다시 은거하였다이 곳에서 몽천요(夢天謠)를 썼다.

 

16532월에 보길도(甫吉島) 부용동(芙蓉洞)에 가서 세연정(洗然亭)을 증축하였고, 명성이 알려져 문인들이 찾아왔다이후 석실(石室), 회수당(回水堂), 무민거(無憫居), 정성당(靜成堂)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7년 겨울에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바로 공조 참의를 거쳐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임명되었으나, 자신과 같은 남인(南人)인 학자 정개청(鄭介淸)을 모신 서원을 철폐하려 하는 서인(西人) 송시열과 논쟁하였다.

 

1659년(효종 10) 5월 4일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현종은 효종(1619~1659)이 봉림대군시절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남)

 

 

효종이 죽자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고 송시열의 시대가 열린다.

 1차 예송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1624~1688)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조선 사회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에서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경우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인 경우는 3년상을, 차자 이하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 세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자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통은 인조-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종법상으로는 그를 적장자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효종은 왕통상으로는 인조의 적통을 계승하였지만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어야 할 일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1년상을 주장한 데 반하여윤휴, 허목 등의 남인은 3년상을 주장하여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윤선도는 효종이 인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어떻게 차남이나 서자로 격하하려는 수작을 부리느냐며 항의하였고 1660년 윤선도는 상소를 올려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예로써 3년 상복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어 예송논쟁에서 패한 남인의 우두머리격인 윤선도는 탄핵되어 귀양 조치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된다.

 

( ※ 참고로 2차 예송논쟁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1618~1674)가 죽게되자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로 또다시 불거진 예송논쟁을 말한다.  이때 서인세력이 축출되고 남인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윤선도가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16604예송논쟁에서 패한 윤선도는 함경도(咸鏡道) 삼수군(三水郡)에 유배되었다가 1665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를 옮겨 전라남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어 백운산(白雲山) 아래 옥룡동(玉龍洞)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667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8월에 해남으로 돌아와 있다가 9월에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였다.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었던 그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같은 성깔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평도 있다.  1667(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자연 속에 묻혀서 시를 읊으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716(현종 12년 음력 611)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사망하였다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