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동학농민혁명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by 성 환 2024. 6. 16.

 


◆ 일자 : 2024. 6. 10 (월)

 

찾아간 곳 : 동학농민혁명모의장소 - 고부관아터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 만석보터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19세기 후반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폭정이 극에 달해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외세의 경제침탈마저 노골화 되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고조되자, 1893년 11월 고부면 주산마을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모여 우국충정의 불타는 마음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세우고 결의하여 1894년 1월 10일 봉기함으로서 시작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東學)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근대화운동으로 동학정신에 기반을 두었다하여 동학난(東學亂), 동학혁명(東學革命),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등으로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도 불린다.

* 우리들 중고시절(1960년대)엔 동학란이라 했다.

 

* 동학(東學)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창건한 사상으로 여러 민족 종교의 모태이며 현재 천도교(天道敎)의 전신이다.

  또 동학계의 일파로 수운천사 이상룡(李象龍)을 교주로 삼고 있는 수운교(水雲敎)도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요약)

1894. 1. 10  고부 봉기

          3. 20  전봉준, 손화중 봉기(무장)

          3. 25 백산집회

         4. 07 황토현 전투 (정읍)

         4. 23 황룡촌 전투 (장성)

         4. 27 동학농민군 전주성 입성

         5. 05  청군 상륙 (아산) : 정부의 청군 원병요청(4월 28일)

         5. 06  일본군 상륙(한성) : 일본군 개입

              * 청일전쟁(1894. 7. 25 ~ 1895. 4. 17)의 시발

         5. 08 전주화약(全州和約)

              * 청군과 일본군의 등장으로 국제분쟁의 국면을 피하고자  동학농민군과 조선 조정 사이에 맺어진 협약

         6. 21 일본군 경복궁 침입

         10월  남북접 논산에 집결 ,  전봉준의 남접 (南接)은 삼례에서  손병희의 북접은 청산에서 출발

         10. 24 ~ 11. 10 공주 우금치전투 패전

         12월 순창 피로리(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에서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 체포

             * 일자는 모두 음력임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


 

↑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대뫼마을)

 

↑ 대뫼마을 입구

 

↑ 東學革命謀議塔(동학혁명모의탑) :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

 *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1969. 4월 대뫼마을 입구에 세운 탑이다.

 

↑ 모의탑 옆에 새겨진 사발통문

 

대뫼마을

 

예전부터 대나무가 많아 죽산(竹山)이라 했던 마을이다.

우측으로 나지막한 동산자락엔 지금도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이곳 대뫼(竹山) 마을의 정기를 끊어버릴 의도로 배처럼 떠돌아다니라는 의미의 주산(舟山)으로 개명하여 아직까지 주산마을로 쓰고 있으나  2020년도에 주민들이 역사성 회복차원에서 다시 대뫼(죽산)마을로 고쳐부르기 시작했다.

 

 

 

↑ 담벼락에 벽화가 그려진 집이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의 집이다.

 

 

↑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 / 사발통문 작성의 집

 

 

사발통문(沙鉢通文)이란 격문(檄文)이나 호소문 따위를 쓸 때 누가 주모자인가를 알지 못하도록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둥근 원안에 뺑 돌려 가며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통문을 말한다.

 

사발통문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했던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작성된 것으로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감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한다.

2. 무기창고와 화약고를 점령한다.

3. 전주 감영을 함락시키고 한양으로 직향(直向)할 것 등을 결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4일 신중리 주산마을 송준섭(宋俊燮)의 집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옛날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과 지금의 신중리 주산마을 송준섭의 집이 같은 집인지 알 수 없으나  70여 년이 지난 후 발견된 사발통문의 진본 여부에 대한 학계의 해석이 아직도 분분한 가운데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있다.

 

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 동학농민혁명 홍보관

건물의 윗층은 동학농민혁명 홍보관이고 아랫층은 대뫼녹두회관으로 마을회관이다.

 

 

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해간 무명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으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사)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1994년 9월 11일에 건립하였다.

 

 


고부관아터(古阜官衙址)


 

 

↑고부초등학교(고부관아터)

 

고부관아는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의 고부농민봉기 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의 현장이다. 

고부관아에는 원래 동헌과 객사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으로 1911년 고부관아 건물을 모두 철거해버리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고부공립보통학교)를 세웠다.

그러므로 관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이곳이 관아터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 때 미리 알고 도망쳐 살았고 이 일로 고금도에 잠시 유배되었을 뿐 그 후로도 아주 멀쩡하게 고등재판소 판사로 중용되는 등 호의호식하다 1912년 5월 68세로 자연사(自然死)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 황토현전적지


동학농민혁명은 고부에서 봉기하였지만 각지에서 농민운동이 있었기에 기념공원은 이곳만 있는건 아니다.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광주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5년전에 조성이 완료되었고 이곳 기념공원은 2년 전인 2022년 5월 11일에 개설했다고 한다.

오늘 좀 아쉬운 건 월요일 휴관하므로  좀 더 상세한 자료를 얻지 못하고 걷만 보고 돌아가는것이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사발통문광장

 

방문자센터 511

 

 

교육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울림의 기둥

 

 

 

동학농민혁명 박물관 / 추모관 / 전시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월요일은 휴관일이어서 기념관은 물론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 모두 겉만 보고 지나간다.

동학농민운동 기록물은 2023년 5월 18일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뒷편 모습

 

죽창결의 

대지에 뿌리를 둔 순박한 농민들이 자기들에게 가해진 억압과 착취를 떨쳐내고자 죽창을 들고 일어나 강인한 혁명가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상징화한 조형물이다.

 

 

▼황토현전적(黃土峴戰蹟)

黃土峴戰蹟地(황토현전적지)

 

이곳 황토현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맞서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응징하려 한다.  사태를 수습하러온 정부 관리는 모든 잘못을 농민군에게 씌우며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에 분개한 농민군은 3월 25일 백산에 집결하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임명하여 4월 7일 황토현(황토재)에 진을 치고 있는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황토현 전투는 관군과의 최초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데 의의가 있고 이로 인해 농민군의 사기가 충천하게 되며 향후 동학농민군의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 이곳에는 승전을 기념하는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과 갑오 동학혁명 기념탑이 있다.

사적(史蹟) 정식 명칭은 정읍 황토현 전적이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

濟世門(제세문)

 

黃土峴戰蹟地淨化記念碑(황토현전적지정화기념비)

 

輔國門(보국문) 

 

 

보국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전봉준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이 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 기념관이 있고↓↓

 

↓↓좌측에 濟民堂(제민당)이 있다.

 

▲불멸-바람길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을 형상화 한것이다.
임영선 작가의 작품으로 2022년 6월 25일 건립되었다고 한다.

남녀노소가 어울어진 1차봉기 행군상과 2차봉기 행군상이 전봉준 대장을 정점으로 사람인(人)자 모양을 띠고 진군하는 형상이다.

 

↑ 救民祠(구민사)

구민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희생된 분들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 황토현전적기념관 뒷산으로 올라가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 간다.

 

↑ 甲午東學革命紀念塔(갑오동학혁명기념탑)

 * 1963년 8월에 결성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추진위원회」에서 1963년 10월 3일에 세웠다.

 

除暴救民 輔國安民 (제폭구민 보국안민)

전서체로 쓰여진 輔國安民(보국안민)의 輔자를 여기에는 保(보)자로 잘못 새겼다.

탑 건립 당시는  60년대 안보(安保)를 강조하던 때여서 保國(보국)이란 용어를 많이 쓰던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아 잘못 새긴거라 한다.

 

甲午東學革命紀念塔(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당시에는 「동학란(東學亂)」이라 불리던 시절이어서 농민의 존재보다는 동학의 상징성이 강조되던 때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농민이 빠졌지만 혁명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기념탑 건립의의가 있다고 한다.

 

* 5월11일은 2019년 정부가 제정 공포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다.

 


만석보터를 향해 말목장터로를 달리던 중 우측에 눈에 띄는 조형물이 있어 가던길 되돌아와 들여다 본다.

「만석보혁파 선정비」「동학농민혁명 최초봉기 상징조형물」이 있다.


예동마을 입구

 

만석보혁파 선정비각과   동학농민혁명조형물,  우측 건물은  예동복지관

 

만석보혁파 선정비(萬石洑革罷善政碑)

- 현위치 :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 이곳에서 만석보가 있었던 곳까지는 2km정도의 거리에 있다.

1892년 5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의 학정과 배들평에 관수를 위한 광산보(예동보,민보)가  정읍천에 있었음에도 민보 아래 동진강과 합류하는 곳에 더 큰 만석보를 축조하여 수세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 가혹한 수탈과 학정을 저질러 농민들을 분노케하므로 사실상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만석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농민군들에 의해 보의 일부만 파괴 되었으나 그 이후 1898년 고부군수로 새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선정비를 세웠고 비문에는 군수 안길수의  만석보 혁파를 칭송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나  많은 새월이 흐르며 비문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희미해져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는 1994년 지역민들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 비석을 들여다 보니  글자는 보일듯 말듯 알아보기 어려웠다.

 

 

예동복지관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 조형물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이전에 혁명에 참여할 군중을 모으는 걸굿이 이곳 예동마을에서 1월 8일에 있었다.

군중은 말목장터에 집결하여 전봉준 등의 지휘아래 고부관아를 점령하게 된다.

이곳 조형물은 예동마을이 고부봉기의 시발점이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봉기라는 상징성의 표현인 것이다.

 


만석보터(萬石洑址)


 

지도상에 표기된 만석보유지비가 있는곳이 실제 만석보가 축조되었던 곳으로 그곳이 만석보터이다.

현장에 가면 만석보터(지도의 만석보유지비)에 만석보유지 표석이 있고 지도의 만석보터에 만석보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만석보가 어디쯤에 있었을까 살피며 뚝길을 걸어간다.

 

↑앞에 보이는 하천이 정읍천이다.

 

 

↑배들평(이평梨坪)

정읍천을 뒤로하고 바라본 넓은 들판

 

↑만석보기념비와 만석보유지비

 

↑萬石洑遺址碑(만석보유지비)

만석보유지비를 왜 정읍천변에 세웠을까?  좀더  내려가서 만석보가 있었던 곳에 세울것이지...

 

 

만석보 조감도를 보면 정읍천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쌓은 광산보( 또는 예동보, 민보)가 있고 그 아래 동진강에 합류하여 넓어진 동진강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새로이 축조한 만석보가 있다.

위키백과에는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설치한 보가 있었으나 고종30년(1893)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두 하천이 합류하는 하류지점에 새로 만석보를 축조하였다라고 적고있다.

태인천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태인천은 현 지도상에는 없는 지명이다.

정읍시사 (井邑市史)에 「태인천은 만석보터 부근에서 정읍천과 합류한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동진강은 태인을 관통하며 동진강 본류를 이루고 있는데 옛날엔 강폭이 좁은 태인을 관통하는 천을 태인천이라 했던 것이다. 

 

↑ 만석보터가 있었던 곳 쯤에서 상류쪽을 바라본다.

왼쪽으로 동진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정읍천이 흐른다. 가운데 볼록 솟은 동산은 만석보쉼터이다.

이제 만석보심터 정상으로 가서 이곳을 내려다 보자..

 

↑ 만석보터 근처에 세워진 萬石洑遺址(만석보유지) 표석

 

▼만석보쉼터 정상에서 바라본 만석보터 주변 전경

↑ 왼쪽 정읍천이 오른쪽 동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지점의 전경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만석보의 위치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  정읍천 너머 이평면의 배들평

 

↑  우측으로 동진강 너머 신태인평야

 

 

↑  동진강 상류방향 / 신태인대교

좌측의 도시는 신태인읍, 동진강의 우측으로는 대부분 정읍시 정우면에 속한다.

 

↑  정읍시 정우면 방향

 

↑  정읍천과 만석대교

정읍천을 경계로 좌측은 정읍시 정우면 우측은 정읍시 이평면이다.

 

동진강 상류에도 이처럼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고 동진강 하류쪽에는 더넓은 김제평야가 있어 모두를 합하여 우리는 호남평야라고 한다.

일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곡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군산항을 개항했다지...

농민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제의 경제침탈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학정이 극에 달할 때 동학농민혁명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전봉준 유적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이 곳곳에 많이 있으나 모두 찾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 우금치 전적지」 답사를 계획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여기서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