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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부여] 사비성(泗沘城) : 백제 사비시대의 왕도

by 성 환 2023. 9. 14.

▲궁남지 ( 宮南池 )

 

▲정림사지오층석탑 (定林寺址 五層石塔 )

 

▲반월루(半月樓)에서 바라본 부여읍 전경

 

▲낙화암 ( 落花巖 )

 


♣  탐방일자 : 2023. 9. 10 (일)

 

♣  탐방순서 : 나성 - 궁남지 - 정림사지 - 부소산성(삼충사,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낙화암) - 고란사 - 유람선

 

 


 

 

백제 사비성 탐방을 위해 부여를 찾았다.

부소산성을 오르기 전 부소산의 모습과 낙화암 등의 위치를 살펴보기 위해 백마강 건너편에서 부소산을 바라보고 있다.

햇빛을 향해 남동쪽을 바라보게 된다는 판단을 하지 못한 탓으로 역광 때문에 낙화암은 물론 산위의 정자나 누각 등의 모습은 어디쯤에 있는지 특정조차 하지 못하고 이제 사비성의 남쪽 부여나성의 시작점을 찾아 이동한다. 

 

 

 

▲낙화암이 있을 것 같은 곳을 좀 당겨 봐도 잘 보이지 않아 가늠하기 어렵다.

 


 

 

사비성(泗沘城)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부여나성으로 둘러 쌓여 있는 백제 사비시대의 왕도를 말한다.

538년(성왕16)에 웅진성에서 천도하여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도읍이었다.

사비성은 부여나성과 부소산성으로 이어진 산성의 양쪽 끝머리가 부소산을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과 함께 마치 반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 부소산성(扶蘇山城) : 사적 제5호 (1963.01.21)

부소산에 축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실제는 백제 사비시대 왕도의 배후산성이다.

평시에는 백제왕실에 딸린 후원 구실을 하였고 전란시에는 도성의 최후 방어시설 역할을 하였다.

 

* 부여나성(扶餘羅城) : 사적 제58호 (1963.01.21.)

부소산성의 북나성에서부터 동쪽으로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필서봉(筆書峰 118m)을 지나 금강변까지 동나성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사비성 시가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 방어시설이다.

부여나성 안에는 백제시대 왕궁을 비롯하여 관아, 민가, 사찰, 상가 및 수도 수비를 위한 방위시설 등이 있었다.


 

 

나성(羅城)

 

▲나성(羅城)의 남쪽 지점에 이르러 강변쪽을 바라본다.

둔치라고 해야할까 넓게 보이는 초지 너머에 백마강(금강)이 흐르고 있다.

 

▲ 현위치는 필서봉(筆書峰) 남쪽 끝자락이다.

 

나성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 방어시설이다.

웅진(공주)에서 이곳 사비(부여)로 천도를 계획하고 천도하던 해인 538년(성왕16)을 전후하여 쌓은 성이다.

나성의 총 길이는 8km이며 이곳에서 북나성 청산성(靑山城)아래 백마강변 까지의 직선거리는 5km정도이다.

 

 

필서봉과 오석산 사이의 뜸뱅이고개에서 바라본 나성의 모습(복원한 것임)

나성의 우측 산자락에 부여왕릉원(扶餘王陵園)이 있다.


궁남지(宮南池)

 

 

 

궁남지(宮南池)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의 궁남지(宮南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무왕 35년(634년)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 밖에서 끌어다 채우고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무왕 37년 8월에는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과 무왕 39년 3월에는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大池)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궁남지는 처음 만들었을 때 대지(大池)라 했으며 연못 가운데 섬에는 망해루(望海樓)가 있었고 뱃놀이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연못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물을 20여리 밖에서 끌어왔다고 하니 어디에서 물을 끌어왔는지 궁금해진다. 백마강까지는 10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탐방 동행자 :  나의 외손녀(Elena Choo)

 

抱龍亭(포룡정)

 

지금의 궁남지는 1964년 이후에 복원된 것이며 1971년에 궁남지 전각건립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복원공사 이전에는 이곳 주변이 쓰레기가 넘치는 늪지대로 방치된 상태였는데 국유지였던 이곳 일대의 땅들이 민간인에게 매각되기 시작하자 궁남지터라는 확신을 가진 당시 부여박물관장이던 홍사준이 부여 국회의원이던 김종필의 도움으로 사적 제135호로 지정하는 한편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뻔한 궁남지를 이렇게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위치에 대한 논란이 여전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현 궁남지 자리가 복원 전 인공 연못으로 볼만한 적극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더라도 섬에 있는 정자는 망해루(望海樓)였는데 왜 문헌에도 없는 抱龍亭(포룡정)이란 이름을 붙였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포룡정으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있어 궁남지에 얽힌 무왕의 출생 설화를 살펴본다.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궁남지

법왕(法王 / 29대599~600)의 시녀였던 여인이 남쪽 연못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으로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30대600~641)이 곧 서동이라는 이야기이다.

왕이 된 무왕이 설화 속의 연못을 넓히고 신격화하기 위해 연못 중앙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어 궁원지(宮苑池)로 조성한 것이 궁남지라고 한단다.

한편으론 서동의 어머니가 살았던 남쪽 연못을 익산 금마에 있는 마룡지(연동제)라는 설도 있다.

서동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살고 있을 때 법왕이 익산 미륵사가 있는 금마로 순행(巡幸)나가서 정을 통해 낳은 아이가 서동이라는 설이다. 마룡지(馬龍池)라고 하는 현 연동제(蓮洞堤) 바로 옆에는 서동생가터(薯童生家址)가 있다.

 

 

위의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백제 멸망후 5~600년이 지나서 설화와 야사를 저술한 역사서이기에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역사란 유물과 유적이 사회기록과 일치해야 진실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초도 위례성에 대한 논란도 그렇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BC18년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도읍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이도(移都)했다고 적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13년간의 도읍지가 직산(稷山)이라고 적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학자들도 하남위례성으로 옮기기 전 13년간의 도읍지를 천안의 직산지역으로 여겼었다.

그곳에 위례산이 있고 위례산성이 있으며 온조가 처음 머물렀다는 「깊은 골[深谷]」, 도읍의 문이 있었다는 「부소문이고개[扶蘇門嶺]」, 백제군이 주둔하였다는 「군단(軍丹)이 골」과 「대궐터」 등이 지명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세종대왕은 삼국의 시조 사당을 지으며 직산을 백제의 첫 도읍지로 인정하여 온조왕 사당을 1429년에 직산에 세운 바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하남위례성 이전(以前)을 하북위례성이라 하면서 이때부터 직산위례성은 묻혀 버린 채 오늘날까지 하북위례성을 찾아 헤매고 있다.

삼국사기에 온조가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정착할 만한 곳을 찾아 도읍으로 정한 요건 중 하나는 ‘북쪽으로 한수가 흐른다’는 北帶漢水(북대한수)이다. 이 말은 한수 남쪽에 도읍을 정한다는 뜻인데 초도가 한수 북쪽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은 성립될 수도 없고 천년을 찾아봐도 찾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온조가 BC18년 처음 도읍할 때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수를 일부 사학자들은 한내(안성천)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며 삼국유사에는 미추홀을 지금의 아산 인주로 기록하고 있어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6세기 중엽에 창건된 백제 사비시대(538~660) 대표적인 절터로 사적 제301호(1983.03.26)이다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講堂址)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當草)」라고 새겨진 명문(銘文)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정림사(定林寺)였음이 밝혀져 이때부터 정식 명칭은 정림사지가 되었다.

태평8년은 고려 현종 18년(1028년)으로 이때 사찰을 중건했던 해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림사는 고려시대에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79~1984년 발굴조사 결과 절터가 남북으로 중문, 석탑,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일축선상에 놓인 전형적인 백제 남북일탑식의 가람배치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절터 내에는 국보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보물 정림사지석불좌상이 있다.

 

출토된 정림사 명문기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扶餘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제9호(1962. 12. 20)

정림사지 한가운데 자리한 오층석탑은 높이 8.33m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한 모습이다.

(아래 그림 참조 / 출처 : 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5층석탑은 백제 도읍의 한 중심에서 백제의 찬란했던 모습과 속절없이 패망의 길로 치닫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석탑이다. 심지어 백제 멸망시 자신의 아랫도리에 문신을 새기는 치욕을 감내하며 오늘날까지 1400여 년 동안 이 땅에 수많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제자리에 서서 백제 불교와 석탑의 시원(始原)을 전하고 있어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유물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아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 하여 ‘평제탑(平濟塔)’으로 알려져 왔으나 1942년 강당지에서 정림사라는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이후부터 정림사의 오층석탑으로 명칭이 부여되었다.

 

 

동(東)쪽 면

 

남(南)

 

서(西)

 

북(北)

 

1층 탑신에 소정방이 새겨 놓았다는 각자(刻字)가 있는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글씨가 보일락 말락 보이지 않아

박물관에 들어가 탁본을 찾아보니 탑신 사면 모두에 많이도 새겨 놓았다.

아래 사진은  우측에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제목부터 시작하는 남쪽면에 새겨진 글씨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과 같은 국보에 새겨진 수치스런 각자(刻字)는 지울 수 없는 백제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반쪽통일을 이룬 통일신라의 부끄러운 흔적이 아닐는지..

 

 

금당지(金堂址)

부처를 모시던 전각이 있었던 곳

왼쪽 강당(講堂)과 우측 5층석탑 사이에 있다.

 

강당지(講堂址)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던 전각이 있었던 곳으로 백제시대 때는 정면 39.1m, 측면 16.3m의 긴사각형 평면 건물이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백제때 보다 작은 건물(31.8×17.9m)이 세워졌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강당지에 고려시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있어 보호각(保護閣)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8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扶餘定林寺址石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부여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扶餘定林寺址石造如來坐像)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정림사지의 강당(講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고려시대에 정림사를 중건할 당시 세운 본존불(本尊佛)로 추정하고 있다.

재료는 화강석, 높이는 5.62m

불상의 신체는 그동안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남아있던 상태에서 머리와 보관(寶冠)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제작하여 얹은 것이라고 한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지권인(智拳印)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형태를 말한다.

이 수인(手印)을 한 불상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한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두손을 모두 금강권(金剛拳)으로 만들고 가슴까지 들어 올린 후 왼손 검지(집게손가락)를 펴 세우고 그 위쪽으로 오른손 주먹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검지가 서로 맞닿게 한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며 이 수인(手印)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일체의 무명 번뇌가 부처의 지혜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理)와 지(智)는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이다.

*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안에 넣고 다른 네 손가락으로 감싸 쥐는 것

 

불상의 옆모습

 

 

강당과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있는 건물지(建物址)이다.

 

정림사지박물관으로 향하며 뒤돌아본 모습

 

 


관북리유적

사적 제428호(2001. 2. 5)

백제 사비시대(538~660) 123년간 나라를 다스린 궁궐터로 부소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관북리 유적은 부소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백제 사비기의 왕궁터가 있던 곳이다.

 

 

 

이곳 저곳 모두 다 들여다 볼 겨를이 없어 부소산으로 향한다.


부소산성(扶蘇山城)

 

 

 

▲충령사忠靈祠

부여지방의 호국 전몰(戰歿) 군경과 파월용사(베트남에 파견한 용병)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1956년에 건립하고 매년 6월 6일(현충일)에 추념행사를 하는 곳으로 백제 사비시대와는 관련이 없다.


삼충사(三忠祠)

義烈門(의열문) : 입구

 

 

삼충사(三忠祠)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으로 1981년에 다시 지었다.

해마다 9~10월 개최되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세 충신에게 올리는 삼충제(三忠祭)를 지내고 있다.

성충(成忠)은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며 흥수(興首)는 백제의 대신으로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언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조정 대신들이 홍수의 의견을 반대하여 탄현을 지키지 못한 백제는 황산벌(논산시 연산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고 멸망하였다

계백(階伯)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영일루(迎日樓)

영일루(迎日樓)

원래 이곳은 영일대(迎月臺)라고 하여 백제 임금들이 올라와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1871년(고종8)에 홍산현(부여 홍산면) 관아 입구에 세운 집홍정(集鴻亭)이라는 문루가 있었는데 그 문루를 1964년 복원하여 이곳으로 옮겨 세우면서 영일루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영일루 위에서 옛날엔 사비도성 전역을 볼 수있었다는데 지금은 키큰 나무들로 계룡산은 커녕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어느정도 사계청소를 하여 영일루다워야 영일루라 하지..

 

올라갈 때는 쉽게 올라갔는데 내려올 땐 무서워서 못 내려오는 겁쟁이..


반월루(半月樓)

반월루(半月樓)

원래 이곳에는 수루망대(戍樓望臺)가 있었다고 한다. 빈터로 남아있던 자리에 1972년에 새로이 건립한 누정이다.

반월루는  부여읍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소산 서남쪽 언덕위에  위치한다.

부소산을 휘돌아 흐르는 반달 같은 백마강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비성을 반월성(半月城)이라 했던 것처럼 성의 이름따라 반월루(半月樓)라 했다고 한다.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읍 전경

 

반월루(半月樓)


사자루(泗泚樓)

사자루(泗泚樓)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며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라는 곳이란다.

조선시대 1824년(순조24)에 부여 임천면(林川面) 관아 문루로 세웠던 개산루(皆山樓)를 1919년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사자루(泗泚樓)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건물 정면의 ‘泗泚樓(사자루)’라는 현판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썼다고 한다.

 

 

옛날엔 이곳에서 달구경도 하고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을텐데 이젠 키큰 나무들로 시야가 모두 가려져 겨우 백마강교와 그 주변이 보일뿐이다.

 

낙화암을 찾아 내려간다.


百花亭(백화정)

 

百花亭(백화정)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29년에 세웠다고 한다.

낙화암 바로 위에 위치한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혜주에 귀양 갔을 때 성밖의 호수를 보고 지은 「江錦水射百花州(강금수사백화주)」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란다.

 

아침 저 건너편에서 이곳을 바라봤었는데 ...

 

목제 난간으로 둘러싸인 낙화암과 저위에 백화정

 

낙화암 이곳에서 백마강을 내려다 봐도 실감나지 않는다.

숲이 우거져 절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란사(皐蘭寺)

 

 

 

고란사(皐蘭寺)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된 고란사(皐蘭寺)는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부소산의 북쪽 기슭 강변에 있다.

절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고 원래 백제 왕들이 노닐던 정자(亭子)가 있었다거나 궁중 내불전(內佛殿)이 있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중건한 절이라고도 하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조선 말(1900년) 부여 은산면(恩山面)에 있던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란사(皐蘭寺)란 절의 이름은 사찰 뒤 벼랑에 자생하는 고란초(皐蘭草 학명: Selliguea hastata)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란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살좌상(皐蘭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菩薩坐像)

 

고란정(皐蘭井)

백제왕이 즐겨 마셨다는 고란약수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고란초

겨울에도 죽지않는다는 여러해살이풀.

습한 바위틈과 절벽, 벼랑끝에 자란다는데 왠일인지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조금 남아있는 정도란다.

 

 


낙화암을 바라볼 겸 유람선을 타고 간다.

 

 

 

낙화암(落花巖)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삼천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바위이다.

백제 멸망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왕권 강화에 힘쓰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뛰어난 영도력을 가진 군주였으나 방탕과 사치 등 무절제한 생활로 결국 멸망을 초래한 비운의 군주로 각인된 왕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낙화암의 원래 이름은 백제 멸망시 후궁들이 굴욕을 당하고 남의 손에 죽을 바엔 차라리 강물에 빠져죽자 하고 바위에 올라 백마강에 몸을 던져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의 타사암(墮死巖)이었다고 한다.

훗날 후궁인지 궁녀인지 논란은 있었으나 타사암(墮死巖)은 궁녀들이 떨어지는 꽃에 비유된 낙화암(落花巖)이 되었고 몇 명의 궁녀들은 삼천궁녀로까지 과장되어 버렸다.

낙화암에 얽힌 삼천궁녀의 전설은 백제 멸망 후 일천 년이 지난 조선 중기에 선비들의 시(詩)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한 선비가 배를 타고 지금 유람선을 타고 지나는 것보다 훨씬 천천히 이곳을 지나며 삼천궁녀라는 말을 넣은 시를 읊었는데 이때부터 전설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고 패망의 군주인 의자왕에게 덧씌워진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 된듯하다.

 

붉은 글씨로 암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巖)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구드래나루터

 

오랫만의 나들이였고 보람된 탐방이었다.

부소산에 올라 산성의 성벽을 찾아보지 못하고 내려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손녀는 예상과 달리 피곤함이 없고 유람선 타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단다.

난 무덥고 긴 여름동안 방치된 다리 근육이 예전같지 않게 일찌기 피로가 오는걸 느꼈다.

아직 발품을 팔아야 할 곳이 많이 남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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