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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공주] 공산성(公山城) : 백제의 웅진시대 왕성

by 성 환 2023. 6. 28.

금서루(錦西樓) 입구

 

임류각(臨流閣)

 

만하루(挽河樓)


2023. 6. 25 (일)

장마를 앞두고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손녀랑 충남 공주에 있는 백제 웅진성을 찾았다.

 

백제는 한성시대(BC18~475)와 웅진시대(475~538), 사비시대(538~660)로 구분한다.

475년 고구려는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한다.

고구려 장수왕이 친히 거느린 고구려군에 의해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한강 유역 일대를 빼앗기고 왕도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한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왕도가 함락되기 직전 신라로 달려가 1만명의 구원병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초토화된 상태였다.

문주는 관리들과 대신들의 보필을 받아 22대 문주왕(文周王)으로 즉위한 뒤 웅진천도(熊津遷都)를 단행하니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이곳 공주 공산성에서 웅진시대가 열리게 된다.

 

 

↑공산성 서문 앞의  광장 회전교차로에 세워진 백제 25대 무령왕 동상이다.

동상은 2021년 9월 18일 제막식(除幕式)을 갖고 모습을 드러냈으며 회전식이라고 한다.

 

 

▲ 답사(踏査) 코스 :  성곽을 따라 01번 코스 중심으로 둘러 본다.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

금강변 공산(公山)의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으로 백제의 수도 웅진(熊津)을 지키던 왕성(王城)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웅진성(熊津城)이라 했고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하는 등 현재까지 여러차례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성의 크기는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둘레는 2.2km이다.

475년 문주왕이 천도하여 538년(성왕16) 사비로 재천도 할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왕성으로 역할을 했다.

성문은 진남루(남문)과 공북루(북문)가 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3년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성내에는 영은사(靈隱寺), 공북루(拱北樓), 쌍수정(雙樹亭), 쌍수정사적비(雙樹亭事蹟碑),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등이 있고, 만하루지(挽河樓址)·임류각지(臨流閣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되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표소를 지나 공산성 서문으로 가는 길에 비석들이 도열(堵列)해 있다. 

이곳의 비석들은 공주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놓은 것들인데 옛날 관리들의 송덕비나 선정비 등이다.

 

 

▲ 錦西樓(금서루)

공산성  서쪽에 있는 성문으로  유지(遺址)만 남아 있었는데 1993년 복원된 모습이다.

 

 

▲ 금서루 누각 모습

 

서문지 주변 건물지(建物址)

 

▲ 이 넓은 잔디밭은 백제 왕성 창고유적지란다.

저 아래  금강변에 공북루가 있다.

 

 쌍수정 사적비(雙樹亭 史蹟碑)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35호

고목 뒤에 쌍수정이 있다.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던 6일간의 내용을 새긴 비석이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이 짓고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만이 썼다.

 

 

雙樹亭(쌍수정)

조선 16대 왕인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 공산성에서 6일 동안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고 앉아 난이 진압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된 후 돌아갈 때 인조는 기대고 앉아 있었던 두 그루의 나무에 정3품의 벼슬까지 내렸다고 하니 짧은 기간동안 시름속에 얼마나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는지 가히 짐작된다. 이때부터 공산성은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충청도 관찰사로 와 있던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해 1734년(영조10년)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던 곳에 정자를 세워 쌍수정(雙樹亭)이라 했다. 

 

雙樹亭(쌍수정)

▲ 쌍수정 앞에 내려다 보이는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곳이다.

 

 

 

 

鎭南樓(진남루) : 문화재자료 제48호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으로 사실상 정문(正門)이며 삼남(三南)의 관문(關門)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문은 1971년 복원된 것이다.

* 삼남(三南)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 臨流閣址(임류각지)

백제 24대 동성왕 22년(500년)에 세웠다고 하는 임류각이 있었던 곳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추정되는 곳이란다.

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복원된 임류각이 있다.

 

 

토끼 한쌍이 전혀 두려움 없이 (더위를 피해 정답게) 앉아있다. 

 

▲ 迎東樓(영동루)

공산성의 동문이다.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하였으나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 공주시민들의 공모를 거쳐 얻어진 이름이 영동루란다.

 

 

 

▲ 光復樓(광복루)

원래 공산성의 북쪽 공북루 옆에 있던 누각으로 공산성 안에 주둔하던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현위치로 옮겨 웅심각(雄心閣)이라 했다.

해방후 김구, 이시영 등이 방문하여 광복을 기린다는 뜻으로 광복루라 개칭한 것이다.

광복루는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다.

 

 

▲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 도지정문화재 제36

정유재란 때 왜적의 위협으로부터 공주 주민들을 보호해준 명나라의 장수 이공(李公),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에 대한 사은(思恩)의 송덕비(頌德碑)이다.

1599년 금강변에 세웠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묻어버린 것을 광복 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 臨流閣(임류각)

임류각은 동성왕 22(500)에 산성의 동쪽에 지은 누각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공산성 발굴조사된 임류각지(臨流閣址)의 구조를 근거로 1993년 현위치에 2층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임류각을 지나 만하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다.

 

 

▲만하루가 내려다 보이고 

 

▼성 안쪽에 영은사가 있다.

▲영은사(靈隱寺)

영은사는 1458(세조 4)에 세조의 명으로 창건한 사찰로 묘은사(妙隱寺)라고 불렀다가 1624(인조 2)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 절로 와서 안전하게 피신한 후 영은사(靈隱寺)로 고쳤다고 한다.

그 뒤 광해군 81616년에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알고보면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

 

▲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

연지는 공산성 안에 사용할 물을 저장하던 연못이란다.

백제시대에는 영은사 쪽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형식의 석축(石築)모습이 시선을 끈다.

만하루는 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금강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공주 잠종냉장고(公州蠶種冷藏庫)

일제 강점기(1914년)에 충남 잠업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시설

 

 

 

拱北樓(공북루) 유형문화재 제37호

 공산성의 북문

 

 

▲ 공북루 남쪽(성 안쪽)의 왕궁관련유적

이곳에는 왕궁에서 사용하던 많은 건물과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던 곳이다.

 

▲ 공산정

 

공산정으로 이동하며 내려다 본 금강과 공북루

 

공북루와  왕궁관련 건물지

 

公山亭(공산정)

 

 

금강교 저쪽은 백제큰다리

 

 

 

한바퀴 돌고나니  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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