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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전주한옥마을 / 오목대(梧木臺)

by 성 환 2023. 4. 5.

 


4월 둘쨋날 일요일.  갑작스럽게 아들이 드라이브 시켜준다며 가족들을 데리고 떠난 곳이 전주 한옥마을이다.

30여 년 전 군 생활하면서 1년 반 정도 머물렀던 전주였는데  전주 한옥마을이나 전주에 대한 정보는 등한시 한 채 지냈던 곳이다. 

그 때 전주 송천초등학교를 다녔다는 큰딸이 기억을 풀어내지만 난 출퇴근길 외에는 뚜렸한 기억이 별로 없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화창한 봄날이어서인지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입구는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어 방향을 돌려 풍남문 회전로타리에 갓길 주차를 했다.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

회전로타리를 돌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휴대폰으로 한장 찍었는데 풍남문(豐南門)이다.

풍남문은 성의 남쪽문으로 앞에는 옹성(甕城)이 있고 문루에 풍남문 현판이 걸려있으나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아래 사진과 자료의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전주 풍남문 (全州 豊南門) : 보물 제 308호

풍남문은 조선 시대에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를 둘러싼 전주성의 남쪽 문이다. 원래 전주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성의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에는 이미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절반이 넘게 허물어져 있던 전주성을 영조 10년(1734)에 크게 고쳐 쌓았고, 이 때 남문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이후 영조 43년(1767)에 불타자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짓고 풍남문이라 하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태어난 풍패(豊沛)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에 비유하여 풍패향이라 불렀으며,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으로 풍남문이라 하였다. 문루 2층의 남쪽 면에는 전주가 조선 왕조의 고향임을 의미하는 ‘풍남문’, 북쪽 면에는 전라도 행정 중심지로서의 의미인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성문 밖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있다.

 


 

↑한옥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벌써 인파가 시작되고 있나보다.

 

 

▼ 맨먼저 마주한 것은 전동성당(殿洞聖堂)이다.

 

전동성당(殿洞聖堂)

* 사적 제288호(1981. 9. 25)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들의 순교지에 세워진 성당이다.

전주감영의 전주성(전주부성全州府城) 풍남문 밖 근처의 이곳은 1791년(정조 15년)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 등을 비롯하여 많은 복자(福者)들이 박해를 받고 처형된 곳이다.

성당은 1908년 착공하여 1914년 준공되었으나  완공되어 축성식을 가진건 1931년이다.

전동성당은 초기 천주교 성당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이 특징이며 호남에서 최초로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성전 주춧돌은 일제가 허물어버린 전주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돌이 일부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동성당은 서울의 명동성당, 대구의 계산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아름다운 3대 성당으로 꼽힌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쁜 한복을 입은 손녀.

아기 때부터 같이 놀고 공부하며 지냈는데 벌써 저만큼 커버렸다.

 

 

↑노거수(老巨樹)

성당 입구 좌측에 있는 수령 350년의 은행나무이다.

나무둘레 3.8m, 높이 20m의 고목은  그동안 천주교도들의 순교와 성당이 지어지는 모습을 모두 바라보고 있었겠지...

 

 

 

 

 

 

 

 

 

學忍堂(학인당) : 민속문화재 제8호

 

 

 

 

 

 

 

 

 

 

 

 

전주한옥마을의 중심, 태조로와 은행로 네거리

네거리 어느 방향이든 인파는 북적인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한옥마을이 내려다 보인단다.

골목으로 돌아다녀봐야 상가와 관객 뿐이고 골목 골목으로 돌아다니는 것 보다 올라갔다 오는게 훨씬 좋을것 같다.

 

 

 

 

오목대(梧木臺) 

 

오목대(梧木臺) 

 - 기념물 제17호

 

이곳 오목대는 승암산(僧岩山)에서 뻗어내린 발산(鉢山 발리봉) 기슭에 있는 아담한 언덕이다.

이 주변은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삼척으로 이주 전까지  살았던 곳이며 전주는 전주이씨 선조들의 고향이다.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 있는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도성(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조들에 대한 감회가 밀려와 이곳에 와서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먼 훗날 이러한 사실을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실의 성역화 사업을 펼치면서 1900년 고종황제의 친필을 새긴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 고황제 주필유지)」 비석(碑石)을 오목대 위에 세우게 하였다.

세워진 비석(碑石)은 앞의 비각 안에 있다.

*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 고황제 주필유지)」 :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란 뜻

 

↑누각에 편액은 梧木臺(오목대)라고 씌여 있고 계단쪽 기둥에는 청풍명월이 어떻고 고산유수가 어떻다는 등 몇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이곳 오목대에서 동쪽으로 200여m 내려가 길 건너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던 곳이 있다.

그곳을 이목대(梨木臺)라 하며 고종황제 친필을 새긴 「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 구거유지)」 비석(碑石)과 비각이 있다.

 * 「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 구거유지)」 :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란 뜻

 

 

오목대 누각에서 내려다 본 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을 기점으로 1911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호남과 충청의 토지를 강탈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해 갈 목적으로 강제로 군산항을 개항하였으며 전주에서 군산까지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전주성의 서쪽 성곽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건설된 도로가 지금의 「전군가도(全郡街道) 100리 벚꽃길」이다.

일제는 호남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그리고 일본인들의 생활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전주성의 풍남문을 제외한 동,서,북문과 성곽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서문밖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허물어진 성곽 안으로 들어와 일본식 집을 짓고 상권을 형성하여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은 절정에 달했고 전주사람들은 이에 맞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제에 저항하던 선비들이 한옥촌에 모여들어 기와지붕을 얹기 시작했다. 조선 태조의 어진(御眞)이 모셔진 경기전(慶基殿)이 옆에 있어 힘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옥마을은 부자들의 동네가 되어갔다.

해방이 되면서 한옥마을은 전주의 대표적인 부촌이 되었고 인구 밀집 지역이 되었다.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주민들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저항이 만만찮아 일부 양옥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1999년 전주생활문화특구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한옥마을은 서울 북촌, 경주, 안동에 있는 한옥마을과 달리 전통적인 한옥이라기보다 팔작지붕의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를 가지고 일본인 주택과 맞서 민족적 자긍심으로 뭉쳐진 700채 이상이 운집해 있는 도시형 한옥마을인 것이다.

 

 


 

 

 

 

풍남문(豐南門)을 보고서 전라감영(全羅監營)과 경기전(慶基殿)/전주사고(全州史庫) 등이 인근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홀로 여행이라면 시간의 구애없이 답사해 볼 수 있으련만 함께온 가족들 중엔 바쁜 이도 있고 돌아갈 때 일요일 귀경차량들이 정체될걸 생각하면 귀가를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기약없이 왔다가지만 몇군데 돌아보며 몰랐던 것들까지 추억에 담아가게 되었다.

오랫만에 아들 딸과 그리고 손녀, 할머니랑 즐거운 나들이였다.

 

● 다 녀 간  날 : 2023. 4. 2 (일)

● 안 내 지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