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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산 작은산

[창원 마산] 무학산(舞鶴山)

by 성 환 2023. 1. 25.

 

 


● 산 행 일 자 : 2023. 1. 21 (토)

● 산 행 코 스

     서원곡주차장 - 관해정  - 백운사주차장 - 서마지기- 무학산 정상 - 중봉 - 학봉 - 서원곡주차장

 

 

↑왼쪽의 서원곡주차장에 주차하고 다리를 건넌다.

계곡을 올려다 보니 아주 깨끗해 보이고 우측으로 걷기 좋은 목재데크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관해정이 있다.

 

 

↑觀海亭(관해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호(1983.01.08 지정)

 

觀海亭

조선중기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초당을 지어 시서(詩書)를 제자들에게 강론하던 곳에 정구의 제자 장문재(張文哉)가 스승을 위해 세운 정자이다.

그후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인 장문재가  1634년(인조 12)에 회원서원(會原書院)을 세웠고 서원이 있었다하여 이곳을 서원곡(書院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회원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지고 관해정만 남아 있다.

관해정 앞의 수령 440년이 넘는 은행나무는 정구가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각사

 

 

 

 

계곡은 가뭄으로 말랐으나 물이 흐르고 있다면 머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만큼 아름답다.

관해정 앞에서 流觴曲水 遺墟址 (유상곡수 유허지)라는 표지판을 보았는데 가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그런 까닭일까? 

애당초 산행코스는 관해정에서 서학사를 경유하여 능선따라 정상부로 올라갈 계획이었으나 백운사 주차장에 이르고보니 계곡의 아름다움에 이끌렸음을 알았다.

 

★ 流觴曲水(유상곡수)

삼월 삼짇날,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詩)를 짓는 놀이를 말한다.

술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한 수 지어야 한다.

 

↑백운사주차장

 

↑白雲寺 大雄殿(백운사 대웅전)

 

 

 

너덜지대 (애추 崖錐)에 이르러 잠시 뒤돌아 본다.

 

↑창원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라보이는 이곳의 대부분이  마산이다.

지금의 창원시는 2010년 7월 1일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를 통합하여 창원시로 출범하게 되었고  의창구, 성산구,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진해구로 개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마산 일원

↑멀리 산봉우리에 송신탑이 있어 알아보니 불모산(801.1m)이다.

불모산 우측으로는 진해시(鎭海)이고 산너머는 김해시(金海市)이다.

 

 

↑마산만을 횡단하는 마창대교도 보인다.

마창대교는 마산시와 창원시를 잇는 대교로 창원시로 통합되기 전인 2008년 7월에 개통된  사장교이다.

마창대교는 통행료가 있다고 하지?

 

↑마산하면 「가고파」가  떠오른다.

노산 이은상의 고향이 바로 앞이어서 조금 당겨본다.

왼쪽 도심 한가운데 있는 작은 산이 용마산이다.

옛날엔 용마산에서 이쪽으로 연결된 노비산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공사를 하면서 분리 되었고 또 노비산 정상엔 마산문학관이 세워지는 등 주변이 개발되어 옛날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단다.

(그래서인지 산에 오르는 연세 지긋한  창원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노비산을 기억하지 못하더라...)

노비산은 산의 모습이 말을 끄는 노비와 닮았다고 하여 부르게된 이름이라고 한다.

노산 이은상의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서니...'의  「옛동산에 올라」와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의  「동무생각」 등    옛동산청라언덕은 모두 노비산을 노래한 것이다.

 

노산 이은상 시인은 노산동에서 태어났다.

노산동은 노비산의 이름에서 따온 노비산 주변마을이었으나  2020년부터 교방동과 상남동에 통폐합되면서 노비산 주변이 상남동에 속하게 되어 노산의 출생지를  지금은 마산 상남동이라 한다.

 

 

 

서마지기 분기점까지 오르기 직전에  첫번째 365계단이 있다.

 

 

 

 

↑서마지기

어린시절 농촌에서 논 세마지기(600평)를 서마지기라고 했는데 그런 뜻을 가진 분지(盆地)인가?

 

↑서마지기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두번째 365계단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 본 서마지기

 

서마지기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로 주변은 진달래밭이다.

봄철이면 장관일 듯하다.

 

 

가고파

1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정상으로 오르며 바라본 북쪽 방향

 

 

 

정상부

 

무학산(舞鶴山)

무학산은 마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그러니까 서마지기를 중심으로 동쪽의 마산을 향해 남북으로 산등성이를 펼친 모습이다.

신라말 최치원이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산의 형세가 마치 날개를 편 학이 춤추는 것과 같다하여 이때부터 붙여진 이름이 무학산이다.

무학산의 원래 이름은 두척산 또는 장풍산이었다는 설도 있다.

 

 

무학산(舞鶴山 761.4m)

 

 

2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오늘 날씨가 드물게 쾌청하여 멀리 대마도가 보인단다.

 

↑실제 육안으로는 희미하게 보이는데 카메라는 줌기능이 부족하여 선명하지 않다.

구름 아래 좌우로 길게 늘어진 지형이 대마도이다.

 

 

 

마산 앞바다 / 마창대교

 

▲ 3년전 거제 외도보타니아 관광을 마치고 돌아갈 때 거가대교와 거가해저터널을 건너가 본 적이 있다.

 

 

▼ 사방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동쪽 

 

↑남쪽

 

 

↑서쪽

 

 

↑북쪽

 

 

 

 


하   

학봉을 경유하는 코스로 하산한다.


 

 

3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4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하산하며 뒤돌아본 정상부 모습

 

 

 

5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이제는 못 그런다니 서러워라 서러워 

 

 

 

 

↑중봉

 

↑중봉(485m)

 

 

 

6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되 안기자 되 안겨

 

 

 

 

↑십자바위

 

↑항일 독립운동가인 주기철 목사가 매일 밤을 새우며 눈물로 기도했던 장소

 

주기철 목사(朱基徹 1897. 11. 25~1944. 4. 21)

진해 웅천 출신.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한 목사.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 부터 10년형을 받아 복역 중 5년을 고생하다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고향인 진해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

 

↑십자바위에서 올려다 본 무학산 정상부

 

↑바로 앞의 봉우리가 학봉이다.

 

7

처자(處子)들 어미 되고 동자(童子)들 아비 된 사이

인생(人生)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 학봉을 고운대라고 하는지 학봉 바로 밑에 설치되어 있다.

 

↑학봉(鶴峰 397m)

학이 날개를 펴고 춤추는 모습의 무학산은 학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 학봉이다.

지도상에는 부엉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사진의 정 중앙에 있는 낮은 산이 용마산이다.

 

 

 

8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福)된 자(者)다 부러워라 부러워

 

 

 

 

9

옛 동무 노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꺼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10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夕陽)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은상(李殷相) : 1903 - 1982

 

1903년 경상남도 마산 출생.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

1921년 『아성(我聲)』(4호)에 「혈조(血潮)」라는 시를 발표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에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

1925년 -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청강

1929 – 1930년

         시가 분야 : 새타령, 매화동(賣花童), 조선의 꽃, 말몰이, 님 향한 생각이야, 남산에 올라, 말노래 등을 발표

         평론 분야 : 청상(靑孀)민요 소고, 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 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

                      풍수(風水)를 믿던 이들, 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 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

1931년 -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

1932년 그의 첫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을 출간.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등을 실음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남.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

1982년 사망. 국립묘지에 안장

 

 

「가고파」는 노산 이은상이 고향인 경남 마산 앞바다를 그리며 지은 詩로 1932년 노산 이은상의 첫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에 실렸고 1933년 작곡가  김동진(金東振)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학생시절에 가곡으로 작곡하였다.

일제 치하의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에겐 아마 이 곡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는 향수 이상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애창하며 찾아 듣는 곡이 되었을 것이다.

 

「가고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이 시가 갖는 매력이다.

타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가고파를 들으면 정말 고향에 가고 싶고, 고향 친구들이 보고 싶어진다.

마산이 낯선 곳이지만 마산의 뒷산을 오르내리며 나 또한 내 고향을 그려봤고 어린시절 옛친구들도 그려 보았다.

 

 

 

오랫만의 산행이어서 7.4km를  5시간 30분 동안 천천히 걸었다. 

저 도심 어딘가에 가고파꼬부랑길이나 철길시장 등 가볼만한 곳이 있다는데 고단해서 마음뿐이다.

연화산까지 가려했던 계획도 접고 일찍 귀가(울산) 하련다.  (현재시간 오후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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