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에 있는 황석산과 거망산을 연계산행할 계획을 세우고 새벽 4시에 출발하여 06시 40분 쯤 용추사일주문에 다달았다.
일단 일주문 앞에 주차하고 버스를 이용하여 유동마을로 이동한 후 산행을 시작하여 황석산과 거망산을 거쳐 지장골로 하산하는 코스로 쉽지 않을 것 같은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려 한다.
● 산행일자 : 2021. 9. 9 (목)
● 산행코스 : 유동마을 - 황석산 정상 - 북봉 - 거망산 - 지장골 - 용추사일주문
▶ 산행 거리 및 시간 : 13km / 6~7시간 예상했으나 9시간을 썼다.
↑德裕山長水寺曺溪門(덕유산장수사조계문)
※ 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월봉산을 거쳐 금원산과 기백산으로 또 거망산과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산군을 덕유산으로 총칭하기에 덕유산 장수사라 했다.
↑버스정류장 안에 붙여진 버스 시간표
▷용추사종점에서 출발시간 : 07:15, 09:00, 10:30, 12:00, 13:30, 15:00, 16:30, 18:00, 19:15 (9회)
버스 정류장에서 7시15분 버스를 기다린다.
↑대기실 안의 전광판에 잠시전까지 안의버스터미널에 있으니 16분 대기하라더니 갑자기 대기시간도 사라지고 「08:00 출발예정」이라니 난감해진다.
코스를 바꾸어 거망산으로 올랐다가 황석산으로 하산할까 하다가 차라리 유동마을까지 걷기로 하고 내려간다.
청량사 입구 장자벌 정류장까지 내려와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을 만났다.
버스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얼마후 버스가 용추사쪽으로 올라가고 곧바로 내려오는 그 버스를 타고 유동마을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황석산 방향을 바라보니 맑은 하늘엔 새털구름이 떠있고 산록엔 안개가 피어오른다.
↑유동마을 등산로 입구 안내도를 보니 황석산 정상까지 4km이다.
↑뒤돌아보니 용추계곡(지우천)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쯤 정상에 선다면 함양읍쪽으로 흐르는 남강이 있어 아름다운 운해(雲海)를 볼 수 있을텐데 느린 속도로는 도저히 기대하기 어렵다.
↑이곳을 지나면서 완만한 등로로 이어지고 내 심장이 여유를 갖는것 같다.
↑저곳이 망월대(1,110m)인가?
↑망월대 근처를 지나며 바라본 남쪽 방향
↑보이는 암봉이 황석산 정상부
↑가운데 암봉이 황석산 정상
↑황석산 정상과 우측에 북봉
↑우측의 기백산과 그 사이에 용추계곡
↑黃石山城 東北門址(황석산성 동북문지)
보이는 산성은 복원된 것이다.
황석산성(黃石山城)은 1987. 9. 18 사적 제 322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함양황석산성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북봉 방향으로 북장대(北將臺)추정지가 있고 주변에 동문지(東門址), 남문지(南門址), 그리고 건물추정지가 있다고 한다.
↑정상부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
↑남봉(南峰)
↑황석산(黃石山 1,192m)
남덕유산 남녘으로 백두대간 줄기에서 우측으로 뻗어내린 금원산과 기백산이 있고 용추계곡을 사이에 두고 거망산과 황석산이 있다. 이들 산중에서도 가장 남쪽 끝자락에 우뚝 솟구쳐 범상치 않은 이 바위산이 황석산이다.
황석산에는 함양의 「안의, 서하」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 황석산성이 있다.
↑황석산 정상과 남봉 사이에 축조된 황석산성
황석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정유재란 당시 이곳 백성들과 부녀자들까지 참여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 성이 함락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절벽으로 몸을 날려 떨어져 죽은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하는 황석산성 전투가 있다.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벼랑바위는 우전마을쪽에서 올라오며 볼 수 있는데 이름하여 피바위라고 한단다.
↑남봉을 배경으로 셀카로 한컷 남긴다.
아직 가시지않은 운해도 아름다운데 저 멀리 머리를 드러낸 봉우리들은 아마 지리산으로 추정해 본다.
↑정상에서 진행 방향 (북쪽)
바로 앞의 암봉으로 보이는 곳이 북봉(北峰)이고 능선따라 마지막에 솟구친 봉우리가 거망산이다.
거망산의 주봉은 저 높은 봉우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작은 안부(鞍部)를 지나 낮게 자리하고 있더라...
↑정상에서 북동방향의 기백산(1,331m)
↑정상에서 동쪽 방향
왼쪽 유동마을에서 출발하여 보이는 능선을 따라 이곳 정상까지 올라 왔다.
↑정상에서 남서쪽 방향
우전마을과 건너편 대봉산(1,252m)
↑이제 거망산을 향해 이동
↑뒤돌아 본 황석산 정상
↑북봉방향이나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북봉을 우회하는 길은 거칠고 이처럼 매우 미끄러운 곳도 있다.
↑북봉을 우측에 두고 우회하며 올려다 본 북봉은 급경사 암봉이다.
↑북봉을 지나며 지도상으로는 완만한 능선인데 그렇지않고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등로에서 처음 만난 산님이다.
차~암 빠르기도 하다.
이동간에 거미줄이 날 괴롭혔는데 앞질러간 산님이 그걸 느끼는지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
↑앞서간 산님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앞에 나타나는 산봉우리가 거망산이기를 바라며 ...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니 황석산 정상이 멀어져 보인다.
↑조금 당겨보니 정상이 확실히 맞다.
↑황석산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거망산 능선에 올라 사방이 잘 보이는데 웬놈의 날파리들이 수백마리가 때거리로 얼굴과 몸에 달라 붙는 바람에 도망치느라 사방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다.
↑거망산 정상을 140m남겨두고 지장골로 하산할 수 있는 고개와 같은 안부이다.
↑하산할 때는 풀이 우거진 이 사잇길(지장골로 가는 길)로 갈 계획이다.
↑거망산(擧網山 1,184m))
원래는 자그마한 표석이 자리했던 곳에 빨간 글씨의 거대한 정상표석으로 바뀐 것 같다.
황석산의 정상표석과 비교될 만큼 특별하다.
거망산은 6.25때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의 활동 무대가 되었던 산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지금처럼 숲이 우거지지않아 산이름 처럼 그물을 들어 올리듯 주변의 지세를 살피고 작전을 펴기에 적합한 곳이었으리라.
◉ 정순덕(鄭順德 1933. 6, 18 ~ 2004. 4. 1)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출생
1950. 3. 29 성석근과 결혼했으나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함양 일대를 점령했을 때 남편이 북한군을 도와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게 되면서 헤어지게 된다.
1951년 2월 추운겨울 남편의 겨울옷을 챙겨들고 남편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가 20여일 동안 함께 지내지만 이후 정순덕은 유격대에 합류하고 남편과는 소속 유격대가 달라 따로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며 남편은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13년 동안의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 생가 근처인 지리산 내원골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성대원 이홍희는 사살되고 정순덕은 마지막 빨치산으로 체포된다.
체포당시 총상을 입은 다리를 절단하고 무기징역형을 받아 수감 생활중 1985년 23년만에 석방된다.
석방 후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 일을 한다.
2000년 비전향 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했으나 대상에서 제외된다.
고향이 남한이고 수감중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였으나 정순덕은 고문과 강요에 의해 전향서를 쓴것에 불과하다며 전향 취소를 주장한다.
2004. 4. 1 새벽 마지막 빨치산이며 비전향 장기수 정순덕은 인천 길병원에서 향년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빨치산
러시아어 partisan(파르티잔)의 일본식 발음이 빨치산이다.
partisan(파르티잔)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후방에서 통신이나 교통시설을 파괴하고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며 인명을 살상하는 비정규군(유격대, 게릴라) 요원의 별칭이다.
일본군이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하던 우리 독립군을 칭하던 말이 빨치산이다.
해방 이후에는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6.25전쟁을 치르면서 국내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공비, 게릴라)을 빨치산으로 불러오다가 친일 친북 등 이념분쟁 과정을 거치면서 좌익계통을 비하하고 적대감을 증대시키는 표현으로 최근엔「빨갱이」란 용어로 전환 사용하고 있다.
↑정상에서 사방 조망은 제한 되어 있다.
동쪽편에 기백산이 보이고 파란 하늘에 하얀 새털구름이 아름답다.
☞ 하 산
↑지나왔던 길 : 날파리 공격을 받았던 사방 조망이 좋은 봉우리 (1,250고지)
↑지장골로 하산하고 있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하산하지만 길이 매우 험하다.
비가 많이 내리렸던 탓으로 등로가 유실된 곳이 많고 특히 계곡을 건너는 곳에 이르면 길이 끊기고 겨우 길을 찾아 건너면서도 바위가 미끄러워 몇차례 고비를 맞았다.
↑지장골 하산길이 3km정도 되는 걸 얼마나 힘들고 더디게 내려왔는지 2시간을 썼다.
역시 젊은이들은 다르다.
용추계곡에 이르러 물이 많아 건너갈 곳을 찾는데 한 무리가 힘차게 내려와 앞으로 몰려든다.
젊은이 들은 망설임 없이 신발을 벗고 건너더니 여성들은 옷을 입은 채 잠수를 한다.
나도 등산화를 벗어 들고 조심스럽게 건넌다.
♣ 다른 구간은 모르겠으나 지장골 구간은 거망산과 가까워 이용하지만 우천시 계곡물이 많아지면 절대 삼가야 할 구간인듯 하다.
계곡을 건너면 용추사가 있고 조금 아래에 용추폭포(명승 제85호)가 있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몸이 지쳐서 도저히 그쪽으로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德裕山長水寺曺溪門(덕유산장수사조계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54호
지도상에는 장수사조계문 또는 용추사일주문이라 표기하고 있다.
사찰의 입구에는 일반적으로 일주문이 있다.
대개는 일주문이라하고 경우에 따라 그 절의 특색을 나타내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조계문(曺溪門)이나 불이문(不二門)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금정산 범어사의 조계문, 강원도 고성에 금강산 건봉사의 불이문 등이 있다.
장수사 조계문 뒤로 넓은 터가 있는데 장수사지(長水寺址)인 듯하다.
장수사는 487년(신라 소지왕9)에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창건했고 신라의 원효(元曉), 의상(義湘), 조선의 무학(舞鶴), 서산(西山), 사명(四溟) 등이 수도했던 절이라고 한다.
장수사 뒤쪽의 용추사(龍湫寺)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였는데 6.25때 장수사 일주문만 남고 장수사를 비롯한 계곡의 모든 암자들이 불에 타버리자 1959년에 용추암을 복원하여 용추사(龍湫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일주문(조계문)은 1702년(숙종28)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규모가 장대하고 화려하며 웅장한 모습의 지붕이 특이하다. 홀로 외로이 남아 옛시절을 회상케하는 조계문이 당당해 보이면서도 웬지 쓸쓸해 보인다.
지장골을 내려올 때 마지막 남은 식수를 마실 때 꿀맛이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피로가 쌓여 속도도 느린데 심한 갈증은 계곡물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두어번 미끄러져 넘어지기는 했어도 나뭇가지를 붙잡는다든지 부딪힐 때 배낭이 받쳐주어 무사했고 느림보 산행이었지만 아직 건재함을 자부하며 산행을 마친다.
장수사 조계문을 뒤로하고 귀가를 서두른다.
● 안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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