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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충주] 탄금대(彈琴臺)/수주팔봉(水周八峰)

by 성 환 2020. 10. 21.

● 일자 : 2020년 9월 24일 (목)

홀로 기약없이 떠나던 나의 여행과 산행은 지난 여름을 넘기며 모두가 헝크러지고 말았다.

심장(心臟) 시술 후 하루하루 지나면서 운동의 강도가 높아지면 가슴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느끼며 산행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멀리 해안으로 떠나려 해도 아직은 때가 아닌듯 하여 손녀랑 내륙 깊숙히 충주에 있는 탄금대를 찾았다. 

 


탄금대(彈琴臺) 명승 제42호, 충북 기념물 제 4호

탄금대는 해발 108m의 나지막한 대문산에 위치하며  남한강과 달천이 대문산을 사이에 두고 합류하여 흐르는 곳이다.

탄금대의 명칭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데서 유래한다.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떠 만든 악기로 가야국의 혼이 담긴 악기이다.

가야금을 잘 연주했던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가야금을 들고 신라(진흥왕)로 귀화한다.

이때부터 가야금은 신라 귀족들 사이에 인기를 얻게되고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충주)에서 살도록 했고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 탄금대(彈琴臺)이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산, 작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대문산(大門山 108m)

산 정상의 너럭바위 위에 앉아 절벽을 따라 휘돌아 흐르는 남한강과 주변의 풍치를 음미하며 가야금을 탔던 곳, 바로 그곳이 탄금대(彈琴臺)이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장군이 왜군과 맞서 싸웠던 곳.

문경새제를 넘어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아내기 위해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왜군과 맞서 분전역투(奮戰力鬪)하다 결국 패하고 신립장군이 남한강에 투신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친곳도 탄금대(彈琴臺)이다.

 

 

 

 

탄금대 사연 (주현미 노래)

 

탄금정 굽이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
열두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디가고
물새만이 슬피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대문산 가는 허리
노을진 남한강에
임 부르는 탄금 아가씨

 

 

↑손녀와 함께

 

 

 

 

 

↓충혼탑 바로 곁에 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이 있다.

 

 

 

 

↑길을 잘못 들어 무술공원까지 내려 갔다. 충주탄금대 인증센터 앞이다. 

 

 

↑감자꽃 노래비

일제시대인 193040년대 충주가 배출한 아동문학가 권태응 시인의 시비이다.

시비에 새겨진 「감자꽃」은 아이들이 부르는 평범하고 짧은 노래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항일정신을 담고 있는 저항 시로도 읽힌다.

자주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탄금대기비(彈琴臺記碑) 

 

탄금대기(彈琴臺記)

이 비는 충주의 역사 지리 인물 그리고 자연환경을 예찬한 내용으로 충주는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으로 땅이 비옥하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패권을 다투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중원소경(中原小京)을 설치 옛부터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또한 청풍명월의 고장으로 악성우륵의 가야금 율조가 면면이 이오져오고 문장가 임강수, 명필 김생과 함께 이고장 문화예술을 꽃피웠으며 임진왜란때 신립장군과 병자호란때 임경업장군의 얼이 서린 충절의 고장이다.

이와같이 과거의 영화로움을 바탕으로 인재가 모이고 문화의 원천이 될 축복받는 고장이 되기 위하여 이지역 주민의

부단한 노력과 정진이 있어야 하겠다는 교훈을 준 내용으로 높이 183cm 폭66cm 두께 34cm의 화강석으로 1954년에 건립하였다.

비석의 글은 최남선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이 쓴 것이다.

 

 

탄금정(彈琴亭)

 

 

彈琴亭(탄금정)

2층 누각형태인 탄금정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로 본래 충주관아 내 연못에 천운정이란 정자가 있던 것을 사직산에 재건되었다가, 1955년 다시 이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는데, 목조로 된 정자가 낡고 헐어 지금 이 정자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쪽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탄금대에서도 가장 절경인 열두대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은 질펀하게 호반이 되어 물안개를 일으키고, 서번 박재륜 선생의 글에 죽사 박충식선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지」비가 외롭게 서 있다.

 

 

↓탄금정에서 열두대로 내려가는 계단

↑계단 중간에 「신립장군순국지지비」가 있다.

 

 

↑申砬將軍 殉國之址(신립장군 순국지지)

 

 

 

열두대

임진왜란 때 팔도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조총으로 무장된 십수만의 왜적을 창과 활로 무장한 훈련되지 않은 팔천 군사와 함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면 배수진 전법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곳 열두 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47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순절한 곳이다. 부여의 낙화암이 금강변에 있듯이 탄금대 열두대가 남한강변에서 분위기를 갖게 한다. 열두대란 가야금이 12현 열두줄이기에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또다른 하나는 신립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절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열두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좌측을 바라보고 있다.

달천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천의 탄금대교와 남한강의 우륵대교가 보인다.

 

 

↑우측으로 남한강 상류 방향이다.

 

 

 

↓원점으로 돌아가며 신립장군 위령탑 앞에서 손녀가 한컷 부탁한다.

 

↑樂聖于勒先生追慕碑(악성우륵선생추모비)

 

金石文(금석문)

"忠州는 예로부터 國原城(국원성) 또는 藥城(약성)이라고 일컬어져 왔고 한국의 중앙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中原 또는 忠州라고 불리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문학과 가무가 성행하여 可謂(가위) 문화의 고장으로서의 전통과 면모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특히 탄금대는 신라의 樂聖(악성) 于勒(우륵)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하든 유서깊은 곳이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 장군이 배수진으로서 왜적과 분전하다가 마침내 전세불리로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순국성인(殉國成仁)한 전적지로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樂聖 于勒은 伽耶國人(가야국인)으로서 왕산악 선생 또는 난계(蘭溪) 박연(朴堧) 先生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악성 중의 한분이시다. 가야국이 신라 법흥왕 39년(532)에 멸망하자 악성 우륵은 신라로 망명한을 달래었고 12악곡을 대성한 곳이 바로 이곳 彈琴臺의 大門山이다. 지금도 탄금대에는 우륵(于勒)이 우거하였다고 믿어지는 건조물의 유지(遺趾)가 발견되고 있다. 樂聖 于勒이 이곳 산상에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망국의 슬픔과 망향의 恨을 달래며 가야금을 탄주(彈奏)할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우미청아(優美淸雅)한 음곡에 도취하여 떠날줄을 몰랐다고 한다. 오늘도 彈琴臺에 오르면 저 아득한 1,400여년의 세파(歲波)를 타고 애환에 젖은 가야금 현묘한 음률이 은은히 들러오는 듯하며 변전무상(變轉無雙)한 세태의 무상함을 불현듯 일깨워 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彈琴臺하면 樂聖 于勒을 연상하고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로 于勒先生이야말로 신라 진흥왕대의 文化史를 아름답게 수 놓은 악성이시었으며 당시 이 고장 문화와 예술에 크나큰 영향과 발전을 이룩하게 하였든 것이니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온 伽倻琴의 전래와 함께 이곳 아름다운 유적인 彈琴臺를 위요(圍繞)한 山河와 더불어 영원토록 그 빛을 더하여 가리라. 이에 우리는 樂聖 于勒 先生의 위업과 넋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과 이 고장 文化와 예술의 중흥을 다짐하는 뜻에서 제7회 우륵문화제에 즈음하여 동지들의 뜻을 모아 삼가 이 비(碑)를 세우노라"
서기 1977년 10월 20일

追記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주지부장 의학박사 허제 김풍식 외 회원일동은 비를 세우고 예술원회장 문학박사 月灘 朴宗化(월탄 박종화)는 글을 지었으며, 의학박사 西峰 金思達(서봉 김사달)은 글을 쓰다.

 

● 안내지도

 


수주팔봉(水周八峰)

지도상에는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 달천(達川)변에  493m의 작은 산으로 나타나 있다.

수주팔봉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어 탐방차 쉽게 오를 수 있을지 찾아와 보았다.

팔봉마을에서 산을 바라보면 달천위에 8개의 봉우리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지...

충주에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지인에게 전화해 보니 2시간 코스라고 한다.

지도에 표기된 수주팔봉은 모원정이 위치한 곳이고 실제는 북동쪽으로 올라 두룽산 위에 수주팔봉 표석이 있단다.

그러니까 수주팔봉은 모원정이 있는 곳을 포함하여 두룽산 정상 일대의 8개 봉우리를 말한다.

 

 

진입로가 어느곳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천안에서 수주팔봉을 찾아 오는 길에 구름다리가 보여서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접근하고 있다.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고 주변은 공사중이어서 사실상 진입로도 통제되는 실정이다.

계단으로 오르면 좌측에 모원정(慕源亭)이 있다.

 

 

수주팔봉구름다리이다

구름다리 밑을  팔봉폭포라 한다.  반대편 저쪽에서 보면 낙차가 있어 폭포를 이룬다.

 

팔봉폭포는 인공폭포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앞에서 흘러오는 오가천(동문석천)이 뒤로 돌아 모원정이 있는 낮은 산을 빙돌아 달천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이곳 수주팔봉의 일부인 칼바위를 절단하여 지류의 방향을 돌리고 뒤쪽으로 흐르던 수로는 농경지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팔봉폭포이다.

 

 

모원정(慕源亭)

 

 

↑隱士 李明洙翁 善行記(은사 이명수옹 선행기)

慕源亭(모원정)은 농부였던 이명수가 부모님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양친의 산소가 있는 이곳에 1981년 12월에 정자를 건립했고, 비석은 이명수가 살았던 충주시 지현동과 이웃 동장들이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명수옹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1996년 3월에 세운 것이다.

 

慕源亭(모원정)

 

 

수주팔봉

 

↑정상으로 가는 등로이다.  더 이상 올라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여기에서 돌아 선다.

 

 

손녀가 할아버지 빨리 내려 오란다.

 

손녀와 함께 김치....

 

 

수주팔봉의 정상으로 짐작 된다.  언젠가는 다시와서 올라 봐야지...

 

● 안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