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자 2016. 10. 16(일) ※ 날씨 : 흐리다가 비내림
● 여 행 지 교동대교 - 고구저수지 - 대룡시장 - 교동읍성 - 교동향교 - 화개사 - 화개산 - 연산군유배지 - 망향대 - 교동대교
● 교 동 도 개 요
교동도는 강화도의 서쪽에 위치하며 강화도의 부속 도서로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이다.
교동 북쪽으로는 바다건너 불과 2~3km의 거리에 북한땅 황해도와 마주하고 있다.
강화도에서 교동도까지의 교통수단은 창후리 선착장에서 교동 월선포항 까지 배를 이용하여 왔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를 개통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교동의 면적은 47.14㎢이며 이중 농경지가 28.46㎢로 약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넓은 황금벌판 교동평야에서 생산되는 강화 교동쌀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교동도의 인구는 6.25전쟁 이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로 한때 1만 2000여명에 달했으나 날이 갈수록 감소 추세에 있고 금일(10월 16일) 현재 3,011명(남1,529/여1,482)이 거주하고 있다.
남북분단 이전에는 황해도 연백군(지금의 연안군과 배천군)과 같은 생활권에 있어서 왕래가 잦았다고 하니 교동도를 이해하는데 참고할 부분이다.
● 안 내 도
교동대교 설치 이전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을 창후리선착장은 매점도 닫혀진채 여객터미널 간판만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창후리선착장에서 바라본 교동도, 우측끝에 교동대교가 보인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산은 석모도(삼산면)의 상주산↑
※ 교동은 (민간인 통행제한구역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길목의 강화도 48번 국도 이강삼거리 초소에서 임시출입증을 교부받고 출입한다.
▶ 교동대교(喬桐大橋)↓↓
↑ 대교 주변은 작전지역이라 사진촬영을 금한다고 하여 차안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이다.
▶ 고구저수지↓↓
고구저수지는 교동읍내로 가는길 가에 있다. 참붕어나 잉어, 가물치 등이 많아 사계절 낚시가 가능한 곳이라 하는데 강태공은 볼 수 없었다.
▶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어렵게 살았던 1960년대 흔히 볼수 있었던 면소재지의 골목시장과 다를바 없는 시장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시간이 멈춘곳」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대룡시장은 6.25 전쟁시 황해도 연백군에서 많은 주민들이 이곳 가까운 섬으로 피난왔다가 연백군과 교동도사이가 남북 분단선으로 설정되자 휴전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좁은 골목에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대룡시장이다.
대룡시장이 없어지지 않고 그때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은 섬이라는 지형적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인구 1만 2000명 정도였으니 제법 규모가 큰 시장이었으나 전후(戰後)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진출하고 실향민 어르신들의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시장의 규모가 많이 줄어 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많은 관광객들이 그 옛날 모습의 대룡시장을 보기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되어 버렸다.
시장골목의 모습들↓↓↓
뻥튀기 하는 장면과 구경하는 아이들을 묘사한 벽화↑
골목 끝에는 「궁전다방」이 있고 커다란 박이 지붕처마 끝과 전신주에 매달려 있다.↑
우측 끝으로「일시에 쥐를 잡자」「둘만 낳아 잘기르자」라는 포스터를 보니 쥐꼬리 숙제가 생각나고 「아들딸 구별말고…」 등등 산아제한을 그렇게도 강조하던 그 시절이 새삼 떠오른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교동읍성↑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 교동면 읍내리에 있다.
지방행정 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으로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경기수영 설치시 돌로 쌓은 읍성이다.
성곽의 둘레는 870m, 높이 6m의 규모로 3개의 성문과 문루(동문에 통삼루, 남문에 유량루, 북문에 공북루)를 세웠다고 하는데 모두 언제없어 졌는지 알수 없고 남문의 홍예문만 현재 남아 있을 뿐이다.
읍내리비석군(邑內里碑石郡)
조선시대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도호부사 , 방어사 등의영세불망비 등 교동관내에 흩어져 있던것을 이곳에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교동향교(喬桐鄕校)↓↓
교동향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다
1286년(고려충렬왕12년)에 유학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明倫堂(명륜당)↑
유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히는 곳
大成殿대성전↑
공자의 신주와 유헌들의 위폐를 모신 곳
▶화개사(華蓋寺)↓↓
보호수로 지정 / 200년 된 소나무↘
華蓋寺(화개사)↑
1341년(고려충혜왕2년)에 목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화개산↓↓
화개사에서 오르는 등산로↑
비가 내리고 있다.
교동면 대룡리 일원과 양갑리, 삼선리로 이어지는 황금벌판↑
화개산 봉수대에서 내려다본 남산포↑
화개산 봉수대(華蓋山 烽燧臺)↑
화개산 청동기 암각화(華蓋山 靑銅器 岩刻畵)↑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암각화로 추정하고 있다.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신앙과 생활, 사상 등을 표현하며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내용이 많다.
화개산 정상(259.6m)↑
정상에 설치된 전망 안내도↓
흐린 날씨에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어 가시거리가 매우 짧다.
석모도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
▶연산군유배지(燕山君流配地)↓↓↓
연산군(燕山君) 생애 요약
연산군은 1476년(성종7)에 성종과 폐비윤씨 사이에서 성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남
1483년(성종14)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
1494년(성종25)에 성종의 뒤를 이어 19세의 나이로 조선 10대왕위에 오름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 유자광을 중심으로한 훈구파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일으킨 사화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인 폐비윤시의 죽음과 폐비윤씨 복위문제와 관련된 사화
1506년(연산군12) 9. 2 중종반정으로 폐위. 정현왕후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에 의해 강화도 교동 이곳으로 유배.
연산군은 교동에 위리안치된 상태에서 역질에 걸려 두달만인 11월 6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둘레에 가시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둠
보슬보슬 빗방울은 떨어지고 하늘엔 까마귀들이 무리지어 울고 지나간다. 연산군의 사연을 말해 주려는 듯 ↓
▶망향대(望鄕臺)↓↓
望鄕臺(망향대)↑
※ 실향민의 설움과 귀향의 꿈을 노래한 망향시가 새겨져 있다
在以北父祖之壇(재이북부조지단)↑
※ 이북에 계신 아버지, 할아버지께 올리는 제단
↑북쪽방향
철책 너머 바다건너 북쪽땅, 이곳 실향민들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 불과 3km인데 맑은 날씨 같으면 보이련만 …
교동대교(돌아오는 길)↑
'경승지와 유적지를 찾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천 농다리를 건너 초평호 하늘다리까지.... (0) | 2019.02.07 |
---|---|
청남대(靑南臺) (0) | 2018.10.16 |
경주 불국사 / 석굴암 (0) | 2016.09.12 |
[경북울진]평해의 월송정 (0) | 2016.05.15 |
〔경북울진〕 망양정과 망양정 옛터 (0) | 2016.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