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
● 산 행 일 자 : 2022. 4. 4 (월)
● 산 행 코 스 : (흥교)농장앞 주차장 - 정상 - 원점회귀
▶ 산행거리 / 소요시간 : 5km / 3시간 (느림보산행)
↑주차장
↑서울에서 오신 분들
↑등산로 일부 구간 폐쇄라고 하니 앞서 가시는 분들 뒤따라 가보자.
앞서 간 두분은 보이지 않고 나홀로 천천히~
제법 가파른 구간도 있어 오르다 쉬기를 반복하며 습관적으로 뒤돌아 본다.
연무가 짙게 끼어 시야도 흐리고 그나마 앙상한 교목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
한 여름 나뭇잎이 우거지면 하늘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단양 북벽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나는 갈림길이다.
그런데 북벽 방향은 이정목에 안내표시도 없고 다니지 말라고 붉은 줄을 쳐놓았다.
고씨굴쪽에 주차하고 영월에서 구인사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 단양 북벽을 들머리로 이곳과 정상을 경유하여 고씨굴쪽으로 하산할 계획도 생각해 봤는데 고생 많이 할뻔 했다.
↑저곳이 정상부인가?
정상까지 오는데 1시간 50분 정도 소요 되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분들은 1시간이면 넉넉할 듯...
태화산(太華山) 1,027m
강원도 영월과 충북 단양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올라오는 동안 보았던 것처럼 등산로 주변은 키가 큰 낙엽수 들로 숲을 이루고 있어 사방 조망이 거의 없다.
산 아래는 서강과 동강이 영월읍의 중심에서 만나 산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돌아 남서쪽으로 산을 감싸고 돌며 단양을 지나 충주호로 흘러드는 남한강이 있다.
산의 동쪽 남한강변 산아래 절벽에는 천연기념물인 고씨굴이 있고 산의 남쪽에는 단양의 북벽, 온달산성과 온달동굴 등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산의 정상에서 사방 어느곳 하나 시원스레 보이는 곳 없이 꽉 막힌 산인데 100대 명산에 선정된 것은 아마도 산아래 남한강변 주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정상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동고비 같은 한쌍의 새가 날아와 두려움 없이 가까이 접근한다.
과자 부스러기를 내밀어 주니 아주 빠르게 픽업해 간다.
등산객들의 반응에 아주 익숙해 있는 듯 하다.
하 산
↑원래 등산로 - 저 윗쪽에 사방댐 공사를 하는지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린다.
흥교(興敎)
태화산 등산로 들머리 입구에 자리한 흥교사터는 본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흥교사는 강원도 영월군 태화산에 있다’는 문구를 통해 대략적인 위치만을 가늠할 수 있었으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루어진 학술조사를 통해 정확한 위치가 확인된 곳으로서 통일신라말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 중간생략 -
2012년 시행된 발굴 작업에서는 흥교(興敎)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이 출토되는 등 다양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된 곳이다.
● 안 내 도
산행을 모두 마쳤다. 흥교사터에 대하여 알아보고 가자..
흥교(興敎)에 대하여
흥교분교가 있었던 동네로, 학교터에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興敎寺)」가 있었으므로 '흥교'라는 지명이 유래한다.
이곳이 옛날에는 교통의 중심지로 한 때는 50여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3~5가구가 살고 있을 뿐이다.
흥교에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흥교사는 아홉 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공양미를 씻을 때는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랭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흥교사지(興敎寺址)
왼쪽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고 우측이 주차장이다.
↑태화산을 바라보고...
흥교사터에 영월초 흥교분교 설립 : 1972. 8. 1
폐교 : 1998. 3. 1
2012. 12. 14일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중부고고학 연구소가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궁예(弓裔, ?~918)의 초창기 세력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연구됐던 전 흥교사(興敎寺 ; 世達寺) 실체가 이번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아울러 절터 관련 건물지 10여동과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기와편과 치미, 청자편 등 다량의 유물이 시굴조사결과 나타났다. ----
↑흥교(興敎)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발견
↑2012년 발굴 조사 당시 모습( 2012. 12. 17 춘천MBC 뉴스에서)
흥교사(興敎寺)가 세달사(世達寺)임을 밝혀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卷三에 있다.
『昔新羅爲京帥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奈 李郡 按地理志 溟州無奈李郡唯有柰城郡 本奈生郡 今寧越,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莊舍(장사:농장)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지리에 의하면 명주에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내성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
※ 궁예는 10살 때 안성 칠장사에서 이곳 세달사로 들어와 891년 기훤의 휘하로 들어 갈때까지 약 12년동안 생활했던 곳이다.
궁예(弓裔 ?~918)에 대하여 (요약)
궁예는 태봉국의 군주이다.
궁예는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869년 5월5일 단오에 태어난 경문왕의 서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운의 왕자 궁예는 태어날 때 이가 있었고 당시엔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5월 5일에 태어나 장래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아기를 강보에 싸서 버려질 때 유모가 몰래 받다가 손가락으로 왼쪽 눈이 찔려 애꾸눈인 된채로 유모에 의해 10세까지 안성의 칠장사(七長寺)에서 자랐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된 궁예는 유모곁을 떠나 영월의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란 이름으로 중이 되었다.
세달사는 궁예가 출가할 때의 절 이름이고 고려시대 때부터는 흥교사(興敎寺)라 했다.
흥교사는 2012년 발굴조사 결과 궁예의 출가지(出家址)로 확인되었다.
891년 청년이 된 궁예는 세달사를 떠나 지금의 경기 안성 동부지역인 죽주의 기훤에게로 간다.
사람을 알아볼 줄 모르는 기훤에게 실망한 궁예는 892년 북원(지금의 원주)의 양길에게 들어간다.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는 치악산 석남사에 머물면서 강원도 동해지역, 경북 울진 등 신라의 주변 군현을 공략하여 정복한다.
894년 양길의 휘하에서 떠나 명주(지금의 강릉)로 입성하여 3,500명의 군사로 독립된 세력을 구축한다.
그 후 여러 장수들과 인제, 화천, 김화, 철원 등 강원도 북부지역을 정복하고 황해도 지방까지 진출한다.
897년 궁예는 호족 왕륭이 있는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왕건(왕륭의 아들)을 중용한다.
899년 북원의 양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청주, 충주 등 양길의 영역을 모두 장악한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한다.
국호를 고려라고 한 이유는 옛 고구려인들에게 고구려를 멸망케한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철원으로 천도한다.
철원으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왕건의 본거지인 송악은 패강진(浿江鎭) 호족들의 영향력이 컷기 때문에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이때 청주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다고 한다.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다.
918년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궁예는 왕위에서 축출되며 도망길에 올라 최후를 맞게 된다.
궁예는 철원에서 탈출하여 부양(斧壤 : 철원 휴전선 북쪽 평강)에서 백성들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하는데 철원과 포천 인근의 명성산이나 운악산 등지에는 도망자 궁예에 대한 슬픈 설화가 분포되어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안성 칠장사」를 들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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