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 (월)
주차장에 차량도 별로 없고 월요일이라 그런가 했는데 월요일은 휴관이라고 한다.
기념관으로 들어가 봐야 제주 4.3사건에 대한 생생한 모습과 자료들을 볼 수 있으련만 사전 정보가 없었던 탓이라 생각하고 외부 공원만이라도 둘러보고 가야할 모양이다.
제주 4.3사건의 전말(顚末)
배 경
● 광복후 제주도 상황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민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 극심한 흉년 등이 겹쳤으며,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 군정하에서 다시 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노정(露呈)하여 미 군정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태였다.
● 1946년 11월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남로당 강령은 아래와 같다..
(박헌영 계열이 중심이 되어 남한 지역 좌익진영의 통합을 강화할 목적)
-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제 실시
- 주요산업의 국유화
-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신앙의 자유
- 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 부여
- 남녀동등권
- 초등의무교육제 실시
- 진보적 세금제 실시
- 민족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
- 평화애호국가와의 친선강화 등
(위의 내용들은 당시엔 좌익세력들의 주장으로 탄압대상이었다)
·※ 참고사항
① 남로당은 9월총파업, 10월대구폭동사건, 제주4.3사건, 여순14연대반란사건등과 관련이 있다.
② 1963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박정희는 남로당 군부책임자로 체포되 군사재판에서 1949년 2월 無期言渡(무기언도) 받았다고 보도했다.
③ 1950년 이후 남로당 조직은 거의 붕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북한으로 넘어간 주요 간부들은 북한에서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다.
●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이은 가두시위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이로인해 군중과 충돌이 일어나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제주 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경대응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을 대거 동원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이로인해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단은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검거된 청년 세 명이 일선 경찰지서에서 고문과 구타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들끓었다.
경 과
제주 4.3 무장봉기
●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12개의 지서와 서북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며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 중지, 남한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촉구하였다.
●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남한 단독선거가 실시됐다.
제주도는 제주도당 무장대의 적극적인 거부 투쟁으로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미군정은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계엄령선포와 초토화작전
●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여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가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다.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 피해를 당하는 여순사건이 벌어졌다.)
●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중산간 마을에 대대적 진압 작전이 실시되었다. 일명 초토화 작전이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로 소개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해변 마을로 소개해온 사람이라 할 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 총살했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된다.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 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 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 7일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6.25전쟁 발발과 4.3사건의 종지부
●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도 아직 대부분 그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 내에서도 예비 검속에 따라 1120명이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 암매장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결 과
4.3사건 이후 움직임
●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국회에서 4.3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지고 학살 피해 접수가 잠시 이뤄졌다.
●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진상규명은 중단됐고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이들이나 유가족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시절 4.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어 금기시됐다.
● 전두환 정부 때는 4.3사건을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교과서에 서술했다.
●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가족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와 시민사회에서 4.3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져왔다.
4.3특별법 제정과 공식 사과
●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을 통과시켰다.
● 특별법 제정 이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업추진하게 되었다.
● 2003년 10월 15일 4.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정부 공식 보고서로 확정됐다. 이에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0일 제주도를 방문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 2014년 3월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신규 지정되었다.
● (2001. 3 ~ 2017. 12) 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제주4 ・ 3사건 진상보고서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조사된 종합보고서로 과거 사건을 두고 특별법에 의해 보고서가 작성된 것은 4.3진상보고서가 최초다.
진상보고서는 4.3사건을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집단 살상의 책임은 당시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에게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출간 이후 보수단체가 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다. 보수단체들은 6건의 행정소송과 현법소원 등을 제기했으나 사법부는 이에 모두 각하 혹은 기각 결정을 내렸다.
평 가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었다.
이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제주도는 2005년 1월 27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위령탑
↑각명비(刻銘碑)
위령탑을 빙 둘러 4.3희생자로 결정된 14,256명의 성명, 연령, 사망일자 및 장소가 기록된 비석으로 2009년 4월 3일에 설치되었다.
↑장례를 치루지 못한 희생자들의 상징 조형물이다.
성인 남녀, 어린이 남녀,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태아 등 희생자들을 세대별 의미로 담은 다섯벌의 수의(壽衣)로 표현한 것이다. 평안히 저승길로 가시라는 귀천(歸天)의 의미로 가슴속에 맺혔던 원통함을 푼다는 뜻의 작품이다.
↑위령제단 및 위령광장
위폐봉안실에는 2021. 3. 27 현재 14,412위 봉안되어 있다.
↑위령제단 좌측(서북쪽) 행방불명인 표석구역 : 4.3당시 행방불명된 3,976인의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봉안관(奉安館)
제주공항 등 도내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 안치
↑변병생모녀상
비설(飛雪)
비설은 바람에 흩날리며 내리는 눈이나 쌓여 있다가 거센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뜻한다.
우리는 흔히 눈보라라고도 말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한겨울 아무런 영문도 모른체 안타깝게 죽어간 모녀의 저 모습을 상상해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곳이 정문인 것을 몰랐다.
제주 4.3 평화공원 하얀 조형물 뒤로 문주(門柱)가 있는데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면서 알았다.
다시 주차하러 가기가 좀 그러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