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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에서 두타연까지 (1)

by 성 환 2015. 11. 1.

임진각을 향해 자유로를 달린다.

좌로는 한강이 흐르고......

한강과 자유로를 사이에 두고 군데군데 경계초소와 철책이 눈에 띄는 것으로 봐서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까워졌음을 짐작케 한다.

 

 

임진각에 도착하니 외국인 관강객이 의외로 많다.

임진각, 이곳은 실향민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남북분단의 비극적인 현실을 실감케하는 곳이다.

임진각 건물의 3층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임진강이 흐르고 좌측에 길게 뻗은 임진강철교(경의선), 가운데 자유의 다리,

바로 앞에 망배단이 보인다.

 

 

철교는 상하행선 모두 폭격으로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었는데

1953년 휴전협정에 의해 전쟁포로 12,773명이 귀환할 때

좌측 상행선 철교를 복구하여 포로들을 통과시키고

그 남쪽 끝에 임시다리를 설치하여 포로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했다.

그 다리를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귀환한 다리라 하여) ‘자유의 다리’라고 한다.

 

 

 

 

임진각 주변은 평화누리공원으로 조성되어

공원내에 평화의 종, 임진각지역전적비, 미군참전기념비, 안보전시관 등이 있다.

 

 

 

 

 

 

임진각을 출발하여 백마고지전적지를 향했다.

경기도 전곡을 지날 즈음 전에 살던 곳을 찾으니 얼마나 변해 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다.

한탄강변도 잘 정리 되어 있고 그 땐 없었던 유적지가 있어 잠시 들렀다.

 

 

 

연천을 지나 강원도 철원에 들어왔다.

철원이라 하면 중부전선의 최전방 대명사로 인식되어 있다.

철원읍 대마리에 이르니 백마고지역이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잇는 경원선(현재는 동두천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운행)은

아래 사진에서처럼 이곳이 철도중단점이다.

(전엔 “철마는 달리고 싶다” 표지판이 신탄리역에 있었으나 경원선 복원사업으로 여기에 옮겨졌다.)

 

 

 

 

 

백마고지에서의 치열했던 전투는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어렴풋이 기억되고 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 10. 6 ~ 10. 15까지 10일 동안 치열했던 전투로

이 전선을 담당했던 국군보병 제9사단(사단장 소장 김종오)과

중공군 제 38군 3개사단(112,113,114)이 이 작은 고지를 놓고 쟁탈전을 벌여

유엔군의 지원을 받은 아군이 승리한 전투다.

이 기간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중공군은 1만4천여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아군은 3천5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다.

발사된 포탄 수는 무려 274,954발(아군219,954발, 적군 55,000발)이다.

당시 백마고지는 395m의 무명고지였으나 철의 삼각지대를 감제할 수 있는 주요지형지물로

후방에 철원과 서울로 직결되는 주요보급로와 광활한 평야지대가 있어 경제적으로나 군사지정학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전투는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백마고지의 명칭은 작전기간중 수많은 공중폭격과 포격에 의해 민둥산이 된 고지의 형상이

마치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다하여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종각 저 멀리 보이는 고지가 백마고지(395)로 민통선 내에 있다.(아래 그림)

 

 

 

 

이곳은 제2땅굴, 철원평화전망대 등 DMZ안보관광을 위해 들어가는 노동당사삼거리이며

바로 앞에 검문소가 있다.

아쉽지만 DMZ안보관광은 뒤로 미루고 고석정을 지나 43번국도를 경유 5번 국도를 달리다보니

어느 삼거리 검문소에 이르자 무전기를 든 초병이 “하나오칠삼”하며

내 차량번호를 어디론가 알려주는 것 같다.

아마 민통선 근처를 지나고 있나보다. 얼마쯤 왔을까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는데

또다른 검문소에 이르니 바리케이트로 길을 막고 초병이 다가와 이름을 물은 뒤 길을 열어준다.

좁고 굽은 길에 낯선 밤길 운행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화천읍에 들어오니 역시 조용한 전방 고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